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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3회 작성일 19-10-28 00:16

본문



누군가 석류꽃을 흰 바위 위에 적어 놓았네. 읽을 수 없는 편지일지라도, 바위의 일부가 되어 버린 무릎 아래로 선홍빛 피가 흐르네. 조도(照度)를 높인 편지 안 글자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네. 늦봄이 낮은 곳으로 고여드는 소리. 물소리 안에 맨발을 담그니, 나는 그저 청록빛 바탕 안에서 외로울 뿐이네. 형체가 없어서 외롭고 음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외롭고 마음은 그저 달구어진 돌멩이 안에 지층으로만 내재해 있는 해묵은 뼛조각이런가. 누군가 상처를 내 준다면 허공에 담아둔 유정(有情)한 균열이라도 흔들어 보이련만. 봄의 절정에서 그 끝을 그리워하는, 시인 白石의 높고 외로운 길을 흰 바위 안에서 읽고 있나니. 세상의 끝이 어디뇨. 어린 것을 끼고 앉은 여인이 어느새 허물어진 봄의 심장 일어서려던 것을 영원히 깊은 것 안으로 가라앉히고 있나니. 


좁은 길은, 산들거리는 잎들의 무수한 휘파람 속으로 높은 만곡을 그리는 붉은 흙의 거대한 폐 속으로 스러진다. 나는 홀로라도 이 길 위에서 잎들의 조화로운 대화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 나가고 있나니. 허무한 것들의 대위법(對位法) 속에서, 몇 개의 음표와 몇 조각의 빛깔과 소탈한 부재(不在)만으로 스스로를 해체해 나가며 그것들 속으로 숨고 싶어라. 잎이여 하루를 지나가는, 산꿩의 촉루(髑髏) 위에 산산이 부서지는 빛을 갈라진 목구멍 안으로 넘기거라. 삼수갑산 영(嶺) 넘어갈라고 발 부르튼 산새가 운다. 발톱이 빠진 자리에 쓴 두릅순 돋아 오른다. 시간은 황토빛. 금 간 발바닥은 선홍빛. 봄을 탕진하는 꽃과 산새와 고라니, 높고 거대한 영(嶺)의 환희를 나의 통각(痛覺)은 외로워하고 있는 것이니. 늘어진 넝쿨을 잡고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며 나 호올로 더 깊은 것 안으로 나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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