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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는 아무것도 대변하지 않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면책특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262회 작성일 16-04-07 03:03

본문

 

 

 

 

             바나나는 아무것도 대변하지 않지

 

 

 

 

 

우린 뭐야?

우리는 묶인 거야?

이 세계 어디로든 미끄러질 수 있어?

 

당신이 바나나를 건넨다면

참 잔인하다 생각하겠지

무릎에 누이고 손톱을 꾹꾹 눌러주겠지

우린 쟁반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한 쌍의 바나나였는지 몰라

 

바나나에게 다가갈 땐

처음엔 비틀기 쉬워 보이는 쪽을

먹음직스러운 쪽을

나중엔 좀 더 멍든 쪽을 선택했지

모든 바나나를 비튼다고 어떤 문이 열리는 건 아니야

우리는 선택할 것을 선택했고

바나나의 날들은 곧잘 지나가곤 했으니까

 

모든 열대의 바나나들이

모든 사시사철의 대륙으로 팔려나가

한 송이 두 송이

꽃과 같은 개수 법으로 세어지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쟁반의 세계로 돌아오지

 

문제는

필리핀에서 서울까지는 멀쩡했다가도

쟁반 위에 놓았을 땐 완전한 정물이었다가도

돌아보면 변해 있는 거

 

이미 멍든 바나나는 있어도

지금 넘어지는 바나나를 목격할 수는 없어

어느 밤의 흔적을 뒹굴었는지

바나나의 외도를 증명할 수는 없어

 

너무 쉽게

실체를 내주고

세상 다 잃은 듯한 자태로

개수대에 걸쳐진 너를 보며

불행한 하루를 얘기하기엔 미안한 일

다시,

 

바나나가 돌아올 땐

가장 환한 시간을 떠올리지

무한한 과육이 어쩔 수 없는 과육이

꽃을 누르고 차오르는 시간을

한 송이 두 송이

꽃의 개수 법으로 세어지다가

노랑을 부여잡고

해협을 건너오는

그 후로도 오래 유독 바나나였던 시간을

 

우리는

아직 세계의 바닥으로 돌아눕지 않은

한 쌍의 바나나였어?

 

모든 바나나를 비튼다고

어떤 문이 열리는 건 아니야

제법 미끄러지지 않고

바나나를 벗지 않고

놓여 있는 거지

 

문제는

바나나가 돌아오기까지 쟁반은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거


다시,

한 송이의 환한 바나나가 돌아올 때까지는


 

 

 

 

 

[이 게시물은 시마을동인님에 의해 2016-04-11 18:33:15 창작시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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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현상학님의 댓글

profile_image 현상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후숙과일인 바나나에 대해 글을 밀고가는 솜씨가 쓰고이(야노시호 버젼)!
근데 쬠 야햐긴 합니다만 대략 스무 개가 되어야 한 송이가 되니까 뭐...
바나나와 외도라...쟁반은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진술이 참...머시기하면서도
거시기합니다. 시원시원한 진술이 멋집니다.

허영숙님의 댓글

profile_image 허영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나나라는 사물을 가지고 이렇게 정교하게, 사유깊게 풀어놓은 시는
기성시인의 시에서도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침없는 진술에 사유까지, 이미 한 경지를 이루셨군요
좋은 시 자주 보여주시길요

최정신님의 댓글

profile_image 최정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흔하디 흔한 바나나를 놓고
거침 없이 써 내려간 진술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학습의 기쁨이 이런 것이 군요
자주 좋은시 놓아 주시면 창작의 문청들에게 등불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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