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쭘시-초-1605-23] 귀신이 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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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쭘시-초-1605-23] 귀신이 되는 시간 / 시앙보르
잠이 달아난 밤에
황병기 거문고를 들을 때
나는 귀신이 된다
우주가 내 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은 다리부터 지워지고
손과 팔과 몸통이 이어서 사라진다
작두에 목마저 잘리우면
긴 머리칼만이 흐느끼는 서울의 변두리
꼬리를 내린 개는 눈빛을 죽이고
세로로 갈라진 고양이 눈알이
반짝, 내 정수리를 쪼갠다
현이 어서 끊어지기를
달아난 팔 다리가 어서 돌아오기를
익숙하게 기다리고 만다
겨울잠을 상실한 파충류는
허물을 벗지 못한다, 꿈틀거리는 깊은 눈
짝사랑하던 누나가
빨래줄에 남긴 손수건에 혀가 묻어 있다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쉽게 출렁이는 전체가 된다
마포에서 여의도를 건너오면서
강으로 투신하기를 반복하다가
남자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작고 단단한 어느 이마를 의지해본다
잘 살아라, 어린 연인들아
갸날퍼서 눈물 한 방울 만들지 못하는 연인들아
행복하여라
몸통과 긴 머리칼만 남고도
입술을 섞는 저 가얏고처럼
속으로만 울거라
붉어진 얼굴 드러내는 착한 귀신으로 엮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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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10시가 지나면 거문고를 듣지 않는다.
해가 쨍쨍할 때는 락이나 워십 댄스를 듣는다.
좌뇌뿐 아니라 우뇌까지 현이 꽉 들어찰 때 전율하고 만다.
가야에서 신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우륵이 떠오른다.
멀쩡한 사람이 귀신이 되지 않고서야 적장을 위해 어찌 현을 뜯겠는가.
황병기 선생님은 그래서 무겁고 무섭고 치명적인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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