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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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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40회 작성일 21-12-0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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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 고영민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공손한 손』(창작과 비평)



<감상 & 생각>



사랑도 事物이라니...

하긴, 그걸 현상으로 보는 것으로 부터
모든 따뜻한 오해가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마저 사물이 된 가슴에서 솟아나는 울음소리는
차라리 정직해서 좋다.

- 사랑을 말하는 많은 느끼한, 언어의 나열보다는

시에 파묻혀 어제의 이별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니,
먼 구름 같았던 젊음이 사라지는 모습처럼 잔잔하다.

그리고 보니...
추억에 엉긴 늙은 나무의 시간을 낚는 소리마저,
절간의 무심한 풍경(風磬)소리 같은 저녁이다.

길 잃은 어둠에도 스스럼 없이
나아가는 저녁은 참 많은 이야길 시인에게 하고 있다.

아니, 세월의 헛헛한 그림자 같은 나에게도
이 저녁처럼 그리 나아가라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다.


                                                                                -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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