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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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베어 묶어 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 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 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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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우리의 죄는 야옹』 『모르는 척』 『왔다갔다 두 개의』 등.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등.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여기서 봄비는 그릇된 마음을 상징한다면 잠은 각성과 분발 혹은 활동을 암시한다. 베어 묶어 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수정이 필요한 문장이 메모지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금낭화는 특정한 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지목한다면, 시인 본인으로 내가 쓴 시를 상징한다. 네 개의 유골단지에서 내가 쓴 시가 차고 넘침을 말하고 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 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다. 뒷산에서 뫼 산山과 낳을 산産이 겹쳐 이미 생산한 시집을 상징했다면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 형과 똥개 메리로 이미 네 권을 이루었고 대화가 필요 없는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 물은 원만한 세계관으로 완벽을 은유했다면 둥근 발자국은 구체를 이룬 셈이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 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 봐, 시선은 돌려 현재 묶은 꽃들로 다시 온다. 수정과 퇴고의 과정을 은유한 문장, 빈 눈이 발견된다면 아무래도 속은 아프지만 가차 없이 잘라야겠다.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먹구름이 어떤 일이 좋지 않음을 상징했다면 발뒤꿈치는 발發에 좀 뒤처진 능력과 자질을 은유한다.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봄비가 여간 맞지 않은 문장으로 잠은 각성에 이르고 분발하여 다시 들여다보는 일로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이미 쓴 것을 반이나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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