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따뜻한 응시 – 김남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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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초대시인]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따뜻한 응시 – 김남권 시인
시마을 2월의 두 번 째 초대시인으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김남권 시인을 모십니다. 1995년 조병화 시인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시와 동시, 동화를 쓰며 우리 곁의 작고 소외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온 작가입니다.
김남권 시인의 눈길은 언제나 화려한 곳보다는 삶의 가장자리,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향합니다. 「모래내 사거리」에서 보여주듯, 그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은 두려움이 아닌 따스한 햇살과 첫눈처럼 고요하게 다가옵니다. 죽음조차 일상의 풍경 속에 스며들게 하는 그의 시는 삶에 지친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그의 시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나비가 남긴 흔적에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별을 보며 우주의 순환을 노래합니다(「별의 노래」). 소멸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시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또한 김남권 시인은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굽은 등, 차가운 거리에서 스러져간 노숙자의 삶, 어머니의 고단한 손길…. 그는 이러한 현실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엄하게 기록합니다. 「소금꽃」이나 「노잣돈, 삼천 원 벌기」 같은 시편들이 주는 묵직한 울림은 바로 그 진정성에서 비롯됩니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아동문학가로서의 면모도 그의 시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아이의 맑은 눈으로 본질을 꿰뚫고, 말을 아껴 여백을 남기는 그의 태도는 시와 동시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깁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열 편의 자선시(自選詩)는 김남권 시인이 걸어온 길이자, 낮은 곳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증거들입니다. 이 시들이 시마을 가족 여러분에게 따스한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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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내 사거리 외 9편
김남권
도서관 창가에 앉아 가을 햇살에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고요한 기운이 몰려왔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도 이랬으면,
가만히 햇살에 누워 잠을 자다가
길을 떠나면 좋겠다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누군가 깨우러 왔을 때,
낮에 받은 햇살 때문에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도서관 정원에는 노란 국화꽃이 피어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고
집으로 향하는 기로수길 위로 구르는 낙엽이
쓸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 도서관 문이 열리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열람실 너머로 울려 퍼지고
햇살은 어제보다 깊은숨을 쉬며
도서관을 기웃거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첫눈이 내리면 좋겠다
별의 노래
모든 별에는 수도꼭지가 있어
이른 저녁이 되면
말끔히 세수하고 나와 나를 기다리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서낭당 느티나무 정자를 베고 누워
나를 올려다 보네
노을과 몸을 바꾸는 아홉시가 되면
아침의 노여움도 어둠속에 둥지를 틀고
바람의 표정을 바꾸네
모든 별들이 우주의 눈을 밝히는
자정이 되면
수선화처럼 푸른 어깨를 내밀어
숨막히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네
늦은 세수를 하고 다시 보아도
너는 호수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이 부셔
가슴에 손을 얹고 눈감을 밖에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 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이 시는 꽃, 별 나비 등 자연의 존재와 인간의 내면을 연결하며, 그리움과 순환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배추 벌레가 먹고 남은 밥, 꽃, 별, 나비 등은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고,
그 흔적이 다시 꽃이나 별 혹은 새로운 존재로 이어지는 순환적 구조를 통해 우주적 환생과 윤회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소금꽃
소금은 음식의 시작이자 끝이다
겉절이 하나에도 어머니는 허투루 소금을 치지 않았다
배추를 찬 물에 헹구는 동안에도
하얀 소금 한 바가지는 부뚜막의 가장 신성한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척, 처어억~
잡귀를 물리치는 손사래가 지나간 자리마다
편안하게 숨을 거두고 있는 배추 이파리,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을. . .
어머니의 삼우제가 끝나고
유산문제로 멱살잡이를 하다 분이 덜 풀린 채로
벌컥벌컥 병나발 소주를 들이켜던 순간,
홧김에 집어 든 김치 한 조각을 우적 우적 씹던 누나가
갑자기 “엄마, 엄마~”를 부르던 순간 알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어머니의 손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니가 끼니 때마다 소금으로 간을 하며
그놈의 성질 좀 죽이라고 했던 이유를,
평생을 자식들 입안을 맴돌다가
마지막 순간 천일염 한 줌으로
길을 떠나신 어머니의 유산이 녹고 있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처억척’ 숨이 죽을 때
나도 비로소 누군가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지렁이꽃
눈 속에서 바람의 은신처를 찾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바람의 주검이 머무는
지렁이의 길을 따라 막장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없어 안심되기는 처음
축축한 하늘이 맨살에 닿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눈을 감았다
지렁이의 길은
눈을 감아야 갈 수 있는 곳
눈을 감아야만 눈이 멀지 않는다
지렁이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지렁이가 운다
비가 흙의 잠을 깨운다
바람의 숨구멍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렁이의 분변이 드디어 민들레를 밀어 올렸다
아 , 하고 열리는 하늘
지렁이의 눈을 닮은 민들레의 떡잎
지렁이를 따라 간 사람의 눈썹이다.
노잣돈, 삼천 원 벌기
낡은 손수레가 빨강 신호등 앞으로 간다
폐지를 가득 싣고, 그 위에 눈을 싣고
도로를 가로지른다
리어카를 미는 굽은 등
눈의 무게도 할머니 등 쪽으로 굽는다
그녀의 길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는지
앞을 보지 않는 듯
한쪽 다리가 뱀 무늬를 새기며 간다
오래전, 통통 저 길을 뛰어 건넜을
마른 종아리가 눈에 묻혀 끌려간다
첫눈은 벌써 천눈(天目)이 된 지 오래
하늘을 이고 태어난 그녀 이제 하늘 문을 열고 있다
눈 위에 난 발자국마저 지워야 하기에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저승 갈 노잣돈, 삼천 원 받으러 고물상에 들어선다
폐지 속에 누운 그녀의 눈 속에
눈(雪)의 물이 고여 있다.
꽃별 지다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벽이 왔다
별 하나가 잠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바람이다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어느새부턴가 몸 안의 기운이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손바닥에 남은 한 줌의 공기만 당신 것이 되어 버렸다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두 발로는 버거워
지팡이를 짚고서도 비틀거린다
땅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발을 옮기는 것처럼
허공에 오래 머무르는 발걸음이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위한 말줄임표...
자유로운 몸짓의 마지막 쉼표,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자식 여섯을 잉태하고 키우는 동안
당신의 전부를 먹이고도 양파껍질처럼 남은 것을,
세상의 모든 생명을 길러 내는데 쏟아 부었던
모성마저 단풍의 절정에서 낙엽이 된다
아, 바람이다 당신은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철암역에서 길을 잃다
폐광촌 철암역 앞 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산자락을 간신히 이고 있는
잿빛 파문을 만나게 된다
사람 하나 비켜가기도 비좁은 골목
마중 나온 봄햇살마저 없었다면
벽 속에 갖혀서 콜록거리는
광부의 눈빛도 몰랐을 것이다
사십 년의 시간이 담벼락에 갇힌 채
퇴락한 지붕, 퇴락한 가로등에 매달려
가끔씩 날아드는 새들의 발자국 소리와
꽃과 아이와 아낙들의 낮은 비명소리가
합판 한 장이 전부인 집의 경계를 풀고 있다
개구리처럼 언덕을 올라온 예닐곱 살 여자아이가
연신 '엄마∼' 를 부르다가
건너편 철암역 저탄장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오는 엄마, 소리를 주워담는다
골목은 모두 막혔거나 모두 이어졌다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모두 누웠거나 흩어졌다가 사라진다
골목 끝 더 이상 우물이 아닌 두레박에서 건져 올려진
엄마의 치마, 그 치맛자락 꽃무늬가
구불구불 미로의 담벼락을 따라 피어났다
나비도 없는 쓸쓸한 꽃잎
입을 틀어막고 피어났다
흑백 필름을 주목하다
뼈를 통과하지 못한 빛이
암실 밖에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광부가 사라지고 남은 필름 한 장
엑스레이에 비친 가슴뼈가 앙상하다
막장에서 막장으로 향했던
광부의 마지막 소원은
햇빛 한 번 실컷 마셔보는 것이었으나
하루하루 탄가루만 폐부에 쌓인
광부의 호흡은 멈추었다
몸속으로 까만 물이 흘러
정액마저 까매진 남자들
연탄불에 구운 비곗살에 한 잔 소주로
탄가루를 씻어 내리는 날에야
믿고 따른 아내를 안아주는 날,
광부의 어머니도 광부였다
가난과 배신으로 콩팥까지 까매진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는 판잣집 구석에서
까만 십구공탄을 피워 놓은 채
등신불이 되었다
삼척탄좌 목욕탕에 걸려 있는
광부의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하얗게 타고 있는 내 어머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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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약력]
김남권
1995년 조병화 시인 추천으로 문단 데뷔. 2015년 월간 ‘시문학’ 등단.
계간 ‘시와징후’ 발행인, 강원아동문학회 회장,
제1회 해양수산부 주최 이어도문학상 대상, 비평문학상, 푸른시학상, KBS창작동요대회 노랫말 우수상, 강원아동문학상
시집 “오후 네 시의 달” 외 다수, 동시집 “쉿! 비밀이야” 외 다수, 동화집 “바위소년” 외 다수, kng211@hanme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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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atjdwn님의 댓글
노잣돈 삼천원벌기
가슴이 찡하고
한편으로는 서민의
삶이 가슴아파서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