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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사물의 아가미를 열다 —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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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회 작성일 26-05-15 11:41

본문


 

[5월의 초대시인 ❷ ] 


사물의 아가미를 열다 홍일표의 시적 응시

 

 

  안녕하세요, 시마을 가족 여러분.

 

  녹음이 짙어가는 5, 사물과 존재의 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그 속에 숨은 노래를 길어 올리는 홍일표 시인을 이달의 초대 시인으로 모십니다.

 

  홍일표 시인은 1992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등 묵직한 시집들을 펴내며 한국 현대시의 미학적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지리산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 매계문학상, 천상병동심문학상,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 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그의 시 세계는, 익숙한 일상의 틈새에서 존재의 낯선 전모를 발견해내는 투명한 통찰로 가득합니다

 

  홍일표 시인의 시 세계는 익숙한 사물 속에 숨어 있던 낯선 생의 표정을 천천히 불러내는 공간입니다. 그의 시에서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며 바람과 햇볕, 사람과 시간이 함께 드나드는 살아 있는 몸이 되고, 깨진 컵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전 생애를 고백합니다.

 

  “최대한 집의 숨통을 열어놓고 숨 쉬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안팎이 들락거리며 한자리에서 놀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 「어느 건축가의 고백

 

  홍일표 시인의 시 속에서 사물은 죽어 있는 물체가 아닙니다. 집은 숭어의 아가미처럼 숨을 쉬고, 깨진 컵은 비로소 제 이름을 지우며 일생의 전모를 고백합니다. 시인은 효율과 편리라는 이름 아래 박제된 사물들의 안쪽으로 들어가, 그들이 오래도록 감추어온 상처와 비명, 그리고 찬란한 고독을 문장으로 불러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어느 건축가의 고백9편의 시편들에는 현대인이 마주한 불안과 허무, 그 속에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존재의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9층이라는 높이가 감당하는 쓸쓸함, 원반을 던지며 사라진 방향을 읽는 고독, 셀카봉 끝에서 자아를 복제하는 현대인의 공회전까지시인은 삶의 균열을 미화하기보다 그 틈을 통해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기꺼이 맞이합니다.

 

  시인은 스스로를 노래를 가지러 온 자라 칭합니다. 그가 지상에서 수습한 사물의 유골과 깨진 맹세들이 어떻게 시라는 환한 살풍선으로 부풀어 오르는지, 그 경이로운 과정을 함께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도 끝내 노래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속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하나도 조용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홍일표 시인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여러분의 내면에도 기분 좋은 문장의 바람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글 / 양현근 시마을 대표)

 

==================

 

느 건축가의 고백 9

 

     홍일표

 

 

그의 방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창문이 있다

쓸모의 가능성을 잊은 시처럼 사면이 밝고 환하여 어디로든 통한다

 

사람에게 불친절한 창은

몸 가벼운 햇볕과 바람을 위한 배려 같다

 

오늘도 햇볕이 제일 먼저 방문하여 자기를 증명한다

아침마다 집이 부풀어 올라

풍등처럼 날아오를 것 같다

 

어느 괴짜의 파격적 취향이 저지른 아름다운 불상사라고 말한다

 

불편과 불필요에 방점을 찍고

편리와 필요를 슬쩍 밀어낸 자리

 

최대한 집의 숨통을 열어놓고 숨 쉬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안팎이 들락거리며 한자리에서 놀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바깥도 없고

안도 없는

아니 바깥도 있고 안도 있는

창이 많은 집

숭어의 아가미 같은 창으로 숨 쉬는 집

찌르르찌르르 귀뚜라미와 남몰래 통화하는 집

텃밭의 키 큰 맨드라미가 등대처럼 밤마다 불을 켜는 집

 

하릴없는 바람이 어슬렁거리다 돌아가면 시가 도둑처럼 다녀갔다고 말하는 집

  

 

 

 

 

 컵은 깨지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컵은 컵을 떠나는 순간 제 이름을 지우고

전모를 보여준다

형상을 버린 마음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컵에 대한 해석은 무한으로 이어진다

유리 조각은 흉기가 되고

차갑고 투명한 별이 되기도 한다

 

흉기와 별을 동시에 품고 있던 컵의 과거를 조금씩 이해한다

 

식당 종업원이 달려와 컵의 유골을 수습한다

 

다시 컵으로 돌아가지 못할

몇 조각의 기억들

어디선가 날개 다친 새가 날아와

입안에서 부서진 노래를 뱉어낼 것 같다

 

깨지기 쉬운 허공이니까

누구나 부서져서 돌아가는

장소니까

 

단숨에 일생을 고백한 컵처럼

한순간 조각난 굳은 맹세처럼

 

 

 

 

 

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얼굴 없는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여

달의 종족이거나

오리알쯤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몸을 떼어 몇 개의 알을 더 낳기도 한다

 

이미 죽어서 지워진 몸

용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을 만나는 동안 작은 속삭임으로 신의 귀를 간질인다

시간의 악몽을 통과하는 잠

어둠으로 빚은

세계의 모퉁이에 부딪힌 빛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길이 없으니

나는 아직 까막눈이고

하느님도 보지 못한

희고 둥근 시간의 덩어리들

 

꽉꽉 눌러 사라진 꽃의 표정을 찾는다

 

여기저기 귀들이 펄럭인다

입이 돋는다

목련이 오래 감추어둔 혀를 내밀어 종알거리듯

곳곳에서 부풀어 오르는

환한 살풍선들

 

제 말이 들리나요

 

밀가루 반죽 속에서 동글동글 태어나는 목소리들

나는 여전히 뜨겁고 캄캄한 살이어서

거듭 달의 종족이라고 불러본다

그래야 오늘도 말랑말랑한 하느님인 것

 

빵이라 부를 때 당신은 영영 보이지 않으니

 



악기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 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서쪽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 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귀로

  

 

9층이 9층 밖으로 범람한다

9층은 9층 밖을 넘보다가 자기 얼굴을 놓치고 만다 목소리도 잊고 먹통이 되거나 돌아가는 길을 잊기도 한다

 

그림자는 바닥을 안고 고민한다

고민이 깊어지면 누군가는 그림자를 사다가 거실에 걸어놓고 말을 걸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까마귀 여러 마리가 앉아 있다

 

9층에서 빠져나간 검은 빛들은 심장에서 멀어진 피 같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동쪽을 끌고 간다 정치인처럼 동쪽은 무정란이어서 싼값에 거래되거나 외상으로 팔리기도 한다

 

9층은 기억한다

제 몸 안에 구겨넣지 못한 몸의 쓸쓸함을

 

어느 날 9층의 심장이 뛴다 쿵쿵거리며 말달리는 아이들이 9층을 완성한다 햇볕의 내부가 뜨거워진다 발갛게 달구어진 햇살들이 철학자처럼 그림자를 태워 9층이 밝아진다 직립한 인도풍의 단풍나무 같다

 

몸 밖에 널브러진 그림자가 식어가고

사람들이 위조지폐 같은 고무풍선을 나누어 준다 색이 바래거나 터지기 전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9층이 내려다본다

가설무대처럼 머잖아 사라질

9층이 없는 9




 

원반던지기 선수의 고독 

 

 

너는 하나 남은 태양을 쥐고 있다

차고 딱딱한

어느 날의 이별 같은 것

단 한 번의 사랑 같은 것

 

해 지는 저녁에도 너는 너를 던져서

사라진 방향을 읽는다

내가 어디 갔지?

잠시 어리둥절한 사이

몸에서 빠져나간 몸은 눈보라로 산화한다

고백하자

우리는 언제나 이곳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단지 구름의 높이로 부풀어 꽃피는 심장이었다고

 

입이 없는 노래처럼

너에게 날아가는 돌멩이는 불붙지 않는다

심장을 조여 매고

겨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크고 둥근 태양을 강행한다

몸 밖으로 던진 슬픔이

다시 돌아와 발등을 짓찧는 날

 

반쯤 기울어 빈 수숫대로 서 있는 저녁

흙투성이 태양을 방패처럼 잡고 혼자 어스름을 견딘 몸이 말한다

 

길 끝에 서서

밤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의 눈가에 죽은 이의 이름들이 오래 붐비고 있을 거라고

 


 

 

이면의 무늬

  

 

개가 개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파도의 자세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

공원의 가로등은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네

 

겨울이 명백한 휴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가로등은 끊임없이 어둠의 중얼거림을 거절할 뿐이네

발꿈치에 다른 계절이 눈물처럼 스미는 것

천 년 전 바람이 남긴 말의 각질을 뜯어내며

질기고 딱딱한 공기의 살과 해후하네

 

나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너의 노래를 들으며

여기는 최소한 거기가 아닌 곳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여전히 촛불은 미완의 음악

따듯하게 응고된 슬픔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견디는 것

 

그 사이 수차례 다녀간 눈과 비

봄과 겨울도 모르는 또 다른 목청의 노래가 발바닥이나 겨드랑이에 서식하는 걸

아직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파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네

5분간, 내가 읽지 않은 파도의 표정이 거듭 쓸쓸해지네

 

 

 

나비족 

 

 

해변에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나비를 주웠다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쓸쓸한 연애의 화석인지

나비는 날개를 접고 물결무늬로 숨 쉬고 있었다

수 세기를 거쳐 진화한 한 잎의 사랑이거나 결별인 것

 

공중을 날아다녀 본 기억을 잊은 듯

나비는 모래 위를 굴러다니고 바닷물에 온몸을 적시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것이 나비인 줄도 모르고 하나둘 주머니에 넣는다

 

이렇게 무거운 나비도 있나요?

바람이 놓쳐버린 저음의 멜로디

이미 허공을 다 읽고 내려온 어느 외로운 영혼의 밀지인지도 모른다

 

공중을 버리고 내려오는 동안 한없이 무거워진 생각

티스푼 같은 나비의 두 날개를 펴본다 날개가 전부인 고독의 구조가 단단하다

찢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바닷속을 날아다니던 나비

 

 

 

공회전

  

 

그는 그를 생산하려고 한다

기다란 셀카봉을 들어

하늘을 저만치 밀어내고

지금 이곳에 자기를 낳으려고 한다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려고 밀고 당긴다

이슬방울처럼 웃고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 앞에서 그는 속성으로 제조된다

 

낳고 낳아도 헛헛하여 다시 셀카봉을 든다

그의 셀카봉은 점점 더 길어진다

 

그곳엔 타자가 없다

그곳엔 그가 없다

  

=================  

홍일표

1988년 심상신인상, 1992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매혹의 지도(문예중앙)밀서(문예중앙)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문학동네)중세를 적다(민음사)조금 전의 심장(민음사), 평설집홀림의 풍경들산문집사물어 사전』『조선시대 인물 기행청소년 시집우리는 어딨지?동시집괴물이 될 테야를 펴냈다. 지리산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 매계문학상, 천상병동심문학상,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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