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에 대하여 =신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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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에 대하여
=신 선
검은 모자를 쓴 여자들이
책들이 도열한 행간 사이로 거닐고 있다
치맛자락에 걸린 그림자가
상처 입은 정강이를 들여다보는 사이
활자에 젖은 뜨락은 마른 영토를 갈아엎는다
지식의 묵정밭을 따라온 바람이 파슬리 한 소절 솎아내면
배추흰나비 날갯죽지가 파르르 떨고
지문 밖으로 무성한 잡풀들이 출렁인다
저항을 비껴가는 허공이 뒤를 돌아보자
먹구름은 암막 커튼으로 하늘을 덮는다
온통 검게 변한 우주가
선글라스를 끼고 반사광을 쓸어낸다
횡단보도에는 음험한 비닐봉지가 굴러다니고
내용을 알 수 없는 물음표가 검은 잎의 단층을 흔든다
태양은 골목을 돌아 뒷걸음질하는 오후를 추격한다
팔뚝을 걷어 올린 저녁이 샛길을 빠져나가면
언덕을 잘라낸 경계선은 내려갈 계단을 훑어본다
《시인들》 2026 봄•여름호
신 선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인제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시와의식》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등불 하나 가슴에 걸어두고』 『카오스의 저편』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봄의 현상학』 『나의 타클라마칸』 『갈릴리의 눈』 『매우 단순한 저녁』 『달의 미로』와 산문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아이들』 『나의 뜨락엔 그늘이 없다』가 있다.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모순矛盾은 창과 방패로 앞뒤 사실이 어긋나 맞지 않은 것을 뜻한다.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시 짓는 과정을 수정 및 퇴고가 있다면 다시 들여보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문장 하나씩 들여다보면, 검은 모자를 쓴 여자들이 책들이 도열한 행간 사이로 거닐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어를 꼽자면 아무래도 책이겠다. 책은 책冊의 뜻도 있지만, 문책하다의 책責과 채찍의 책策도 있어 이 문장에서는 후자가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니까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완벽에 가까운 문장이라면 여기에 반하는 것이 책들이 도열한 행간이다. 글은 지면 위 공간에다가 놓는 일이지만 검은 모자를 쓴 여자라 하니 마치 입체적인 느낌으로 와닿는다. 치맛자락에 걸린 그림자가 상처 입은 정강이를 들여다보는 사이 활자에 젖은 뜨락은 마른 영토를 갈아엎는다. 검은 모자를 쓴 여자와 치맛자락에 걸린 그림자가 시 주체라면 상처 입은 정강이는 시 객체다. 마른 영토는 지면을 상징하며 활자에 젖은 뜨락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아예 쓸 것이 못 되니 내다 버리는 격이다. 정강이는 무릎 아래 앞뼈가 있는 부위로 흰색을 대표한데다가 단단함까지 은유한다. 지식의 묵정밭을 따라온 바람이 파슬리 한 소절 솎아내면 배추흰나비 날갯죽지가 파르르 떨고 지문 밖으로 무성한 잡풀들이 출렁인다. 파슬리가 식물계라면 배추흰나비는 동물적 심성을 대변한다. 지식의 묵정밭과 배추흰나비는 대조적이다. 가령, 지식의 묵정밭이 전문적인 입장이라면 배추흰나비는 그야말로 서툴고 어설픈 연막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문 밖으로 무성한 잡풀이 출렁일 수밖에, 여기서 여러 낙서를 잡풀로 은유해 놓음을 알 수가 있다. 저항을 비껴가는 허공이 뒤를 돌아보자. 저항은 바닥을 대변하며 허공은 지상을 대변한다. 지상의 한 관측자가 바닥에서 솟은 것들을 들여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아니 이걸 빼야 되냐 말어, 그러니까 수정이나 퇴고의 심사가 묻어나 있는 것이다. 먹구름은 암막 커튼으로 하늘을 덮는다.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태 써놓았는데 앞뒤 안 맞는 게 분명히 눈에 밟혔을 것이다. 먹구름은 심적 상황인 비의 전조 단계다. 온통 검게 변한 우주가 선글라스를 끼고 반사광을 쓸어낸다. 詩는 易地思之며 反面敎師다. 거꾸로 대보고 처지를 바꿔 읽어도 보아야 한다. 횡단보도에 음험한 비닐봉지가 굴러다니고 내용을 알 수 없는 물음표가 검은 잎의 단층을 흔든다. 참 재밌는 표현이다. 써놓은 문장에다가 동그라미 쳐보고 거기다가 물음표까지 달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자세다. 횡단보도가 자와 자간을 은유했다면 검은 잎의 단층은 검정을 한껏 묻혀놓은 지면을 은유한다. 태양은 골목을 돌아 뒷걸음질하는 오후를 추격한다. 태양과 오후는 동일인, 태양이 완벽의 세계를 은유했다면 오후는 거기에 못 미치는 상황을 묘사한다. 팔뚝을 걷어 올린 저녁이 샛길을 빠져나가면 언덕을 잘라낸 경계선은 내려갈 계단을 훑어본다. 팔뚝을 걷어 올린 저녁은 언덕과 같은 개념이다. 팔뚝에서 팔은 여러 갈래를 상징하며 뚝은 둑보다 강한 어조로 언덕과 일맥상통한다. 언덕 여기서는 구릉지가 아니라 말씀 언言에 덕 덕德자다. 계단은 행간을 은유한 것으로 시의 종말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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