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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포기의 각서/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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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18회 작성일 21-01-25 18:53

본문

마음 포기의 각서 




류진





몇번을 풀어줘도 사자는

철창을 바라고 몇번을 속아도 사지는

심장을 부르지


찜통에서 삶아낸

수건처럼 배 속에서 갓 꺼낸

아기처럼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구만


내 영혼으로부터


내 영혼으로부터

탈출하는구만 저기 빌어먹을 코뿔소 형제


잠깐만, 그럼 내 사파리는 바닥났나? 앞발로 눌러 죽여

태즈메이니아늑대는 앞발을 씹는다 모자라니까


뼈째로 씹어대는 거지 하긴

안 될 게 뭐람 허구한 날 손가락뼈를

뇌운은 뱉어내잖아


연골까지 싹싹 다 발라 먹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아대듯이


나는 창살 속의 구름을 느낀다


심장아, 네가 내 비계에서 피를 빌리듯

내가 철창을 바란다 폭설로부터

혈액을 기증받아 내가 징역을 바란다 죽음은 시인의 광대


삶은 장인의 천칭

천칭의 한 끝에 눈보라 한근을 올려두고

주먹을 쥐었어 그래, 눈보라를

내게서 도려내십시오 다만 피 한방울 없이


잠깐만, 언제 손님이 이렇게 몰려왔지?

내 영혼으로부터


도려내십시오 셔터 내릴 시간이니까

이제 이 닦고 자렴? 잠이 안 와요 눈

내렸나봐요 꿈에서, 영준이가 나를 봤어요, 곡

예사였대요 내가


밀어버렸대요

찜통에서 삶아낸 아기처럼


안 울어요 배 속에서 꺼낸 수건처럼, 희고 멀고 젖은 잠이

안 와요 하긴, 안 될 게 뭐람 네 꿈의 눈보라를 꾹꾹 눌러

쥐어 초밥 만드는 걸 봤으니 죽이러 갈 수밖에


이젠 맥문동뿐이야 시절은 갔고 발굽 빨간 하이에나도 갔고

정말 더 할 말 없어?라며 울더니 전화가 끊겼지


달아나는도다 손톱 없이 두더지

주머니 없이 캥거루, 사슴과 소와 말과

당나귀 없이 사불상

나 없이 나 어흥!


어흥! 어흥! 엉! 엉!

부디 쇠창살을 바란다 꼬챙이 속의 쾌청 이젠 맥문동뿐이야 바닥 가득 동그랗게

돌아버린 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구만

내 바닥으로부터


돌려주십시오 내 영혼아

너는 내가 아니다


내 조련사가 아니다

죽음은 시인의 광대, 빙글빙글 돌려

주십시오 심벌즈를 들어라

잇몸에 이빨을 씌워라 먹구름을 오게 하라 오는 족족

죽이고 또 물어 죽일 테니

맥문동 맥문동 맥문동 맥문동



- 시집 <앙앙앙앙>에서, 2020 -






* 사불상을 정점으로 한는 동물과 맥문동을 종점으로 하는 풀,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메타포.

  시는 읽는 이의 해석에 따라 여러 모양의 이름과 얼굴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시는 누군가의 해석을 듣지 않은 백지의 상태로

  발걸음을 들여놓는 것이 좋다.

  다만 마음 포기의 각서는 신중히 쓰는 게 영혼에 이롭다.

  (참고로, '내게서 도려내십시오 다만 피 한방울 없이'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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