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결을 더듬다/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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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결을 더듬다
길상호
그녀가 쓰던 나무 주걱을 꺼낼 때
나는 지나온 길과 만나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깊이 새겨져 있는
발자국, 그 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여자,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마음에 묻고
그을음 어두운 부엌에 혼자 서서
뚝뚝 수제비 반죽을 떼내고 있다
주걱 위 새하얀 반죽이
손가락 끝에서 잘려 나갈 때
거칠게 일어나곤 하던 나무의 결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걱 위에서
그녀 지워 버렸을까, 끓는 가슴에
하나둘 응어리로 떠올랐을 얼굴
휘휘 저으며 익혀내고 있던 것일까
이제 다시 주걱의 결을 더듬어 보니
그녀 옹이로 단단하게 박혀 있다
결은 옹이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더 촘촘하게 파장을 그린다
그 상처를 쉽게 지나칠 수 없어
오래 서성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나무의 결을 더듬어 가며 나는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에서, 2018 -
* 시를 글로만 읽고 "좋구만"하고 지나치는 것과
시를 마음으로 읽어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사귀는 건 천지 차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밥주걱보다 나무주걱이 더 마음이 가는 건
밥을 푸는 이의 마음이 거기에 스며든 때문이리라.
그에 더하여 시인은 나무주걱을 통해 나무의 결에게까지 이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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