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진은영 > 내가 읽은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내가 읽은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진은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72회 작성일 21-03-30 09:23

본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 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 시집 <훔쳐가는 노래>에서, 2012 -











 * 가장 실생활적인 것이 가장 지고한 관념의 희열을 이끌어낸다.

  시인 자신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뭐, 시를 우리는 읽고 때론 쓰기도 하지만 이런 시는 드물다.

  아름다운 세탁소에 오늘 한번 들러야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5,011건 1 페이지
내가 읽은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조경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913 07-07
5010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4 04-26
500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 04-26
5008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 04-26
500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 04-23
5006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3 04-23
5005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3 04-22
5004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2 04-21
5003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8 04-21
5002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7 04-18
5001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9 04-17
5000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 04-16
4999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7 04-16
4998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3 04-15
4997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92 04-11
4996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8 04-11
4995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 04-10
4994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3 04-10
4993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9 04-10
4992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3 04-10
4991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8 04-09
4990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0 04-09
4989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97 04-08
4988 솔바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8 04-07
4987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1 03-27
4986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2 03-21
4985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1 03-15
4984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1 03-08
4983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6 03-02
4982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27 02-20
4981
담배/장승규 댓글+ 2
조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7 02-18
4980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6 02-06
4979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9 01-30
4978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5 01-23
4977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3 01-16
4976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3 01-09
4975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8 01-02
4974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2 01-02
4973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85 12-31
4972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6 12-26
4971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5 12-25
4970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9 12-21
4969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5 12-20
4968 조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6 12-19
4967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33 12-16
4966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0 12-13
4965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4 12-12
4964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8 12-12
4963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4 12-05
4962 강경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8 12-02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