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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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맵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 시집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에서, 2000 -
* 유명한 영화 [노트북]에서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오래전 첫사랑이었던, 일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보여준다.
다만 인생은, 또 운명은 선택의 열매임을 가르친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어떤 실체가 있는 시, 그래서 영화를 보듯 생각에 잠기게 하는 시.
시는 첫사랑을 융숭한 문장으로, 마치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첫사랑은 시와 영화가 새길 영원한 흙글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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