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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알레르기/박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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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00회 작성일 21-05-16 19:30

본문

노을 알레르기 





박신규






집시가 말했다

지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아라베스끄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성곽에 번지는 노을,

그 붉은 침묵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패멸한 왕이 울며 성을 내어주던 날

홀로 망루에 서서 사라진 후궁처럼

노을 한가운데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유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에 우는 자가 할 수 있는 건

눈물로 얻은 소금 한줌을 뿌려

부패해가는 시간을 하룻밤 더 연장하는 것일 뿐'

금지된 노을을 뒤돌아보면

그리운 얼굴 만지고 싶은 몸은 온통

소금기둥으로 굳어져 부서진다

도무지 잊을 수 없어서 아름답게 조작해버리는 기억처럼

누구나 공평하게 표절하는 것이 또 있을까

망각을 위한 연주는 없는가 집시에게 물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지워낼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노을빛에 온통 미어져 밀려간 사람을 연주하겠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의 빈 가슴을 노래하겠네

허풍선이 바이올린이 삐걱거릴수록

소금창고처럼 건조하고 쓸쓸한 성곽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건

어긋난 사랑이 아니라 썩어가는 몸,

결단코 조작할 수 없는 몸

소금창고에 매달려 그 여자 대롱거리고 있었다

늘어진 혀, 붉은 구더기들

가슴을 긁어 피가 터질 때까지

판자처럼 부서진 머릿속으로 또다시

스멀스멀 노을이 기어들어온다



-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에서, 2017 -











 *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잔혹하다.

   그래서 표절하듯 기억을 아름답게 조작해버리는 것 말고는 

   이 아름다운 알레르기를 이기는 길은 없으리라.

   노을을 이렇게 표현한 시가 일찍이 있었던가 싶다.

   노을처럼 아름다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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