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눈] 듣다/박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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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눈」 듣다
박신규
흰 눈은 희다
실직한 눈은
때 이른 출근길 횡단보도에 희다
한강변에 눈은
만취해 기억이 없다는 눈은
제 새끼를 밴 아랫배에 희다
사채에 쫓기는 눈은
투신한 흔적을 기록한 흰색 선에 희다
때늦은 눈은
칼을 품은 눈은
피 묻은 흰 손에 희다
어미를 폭행한 눈은
컴퓨터 게임 화면에 뿌옇다
본드에 취하지 않은 눈은
임대아파트 구석진 공원에
찢긴 교복 치마 무릎 위에 희뿌옇다
흰 눈은 하얗다
그나마 젊다는 눈은
환갑이 된 이장의 작은 논밭에 하얗다
그 집 이주여성의 신생아 첫울음에 하얗다
동구 밖에서 눈은
혼자 서 있는 가로등 밑에 하얗다
흰 눈은 붐비다
적막한 흰 눈은 붐비다
시퍼런 흰 눈은 붐비다
-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에서, 2017 -
* 「저녁눈」은 박용래의 시 제목이다.
일종의 패러디 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장정일이 쓴 김춘수의 시 「꽃」 패러디가 생각난다.
박용래의 시가 옛 고향의 저녁에 내리는 눈이라면,
시인의 시는 요즘 우리 사는 도시에 내리는 눈이다.
붐비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하나는 지극히 서정적이요, 또 하나는 뿌옇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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