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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책/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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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33회 작성일 21-08-07 17:50

본문

  갈색의 책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2010 -






-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책들을 읽는다.

  또 글을 모르는 우리 어머니처럼 단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흰 것 위에 검은 얼룩이 있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검은 것 위에 흰 얼룩이 있는 책이었다고 각각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책들은 어찌어찌 해석을 당한다.

  그러나 겉장이 떨어져나가고, 제목도 없는 나라는 책은,

  일평생을 골똘히 읽어도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해석하려 대화를 한다.

  또 시를 통해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

  그것도 어려우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해석되어 가기도 하니깐.

  그러니깐 이 시는 책에 대한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해석되어가는 중인 갈색의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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