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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침몰하는 저녁 / 이혜미 ​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이종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94회 작성일 22-04-25 07:43

본문

침몰하는 저녁 / 이혜미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 들이 집요하게도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역시도 이름 버린 것들의 누이가 되고 말 것 같은데

 

나에게 진한 붉음으로 표식을 남긴 저물녘을 건너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세계는 자꾸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려 하고 잘린 나의 탯줄에 다시 뿌리가 내리면, 너는 저물며 빛을 키우고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이 다시 너를 산란한다 그 속에서 나도 세상과 함께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던 것인데, 처음으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내 속의 실뿌리들이 흔들리며 누이야 누이야, 내가 버리고 온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거라 물관으로 흐르는 맑은 피는 양수가 되고…… 체관으로 흐르는 진득한 피가 세계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내는데…… 아아 네가 오더구나,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 네가 오더구나

 

 

 

- 이혜미시집 보라의 바깥(창비, 2011)에서

 

 

 

<시인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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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출생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

 

 

 

<감상 by 이 종원>

 

 

해가 바다에 빠지는 장관을 본다. 시인은 거대한 배가

침몰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아니 저녁이 지고 아침

이 태어나는 아름다운 순환으로 묘사한다. 어떤 이는

사라지는 저녁으로 하여 죽음처럼 생각할 것이며.

른 어떤 사람은 깨어나기 위해 잠에 들어가는 휴식으

로 여길 것이리라. 시의 맛은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달

라질 것이므로 침몰의 크기 또한 다르게 표기될 것이

. 시인이 발견한 이번 저녁의 침몰은 자연스럽게 받

아들이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그 속에 섞여 있는 삶의 

동시성을 연결해주는 순환고리가 아닌가 한다. 지극

히 개인적인 내 생각임으로 혹 시의 주인이 나무랄지

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흔쾌히 동의해주실 것을 기

대하며 자의적 해석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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