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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선언문 =변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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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01회 작성일 24-09-13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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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선언문

=변윤제

 

 

    저는 스팸에 유서를 써요. 어쩌면 이건 죽음 위에 새로운 죽음을 눌러 적는 일. 선홍빛 살에 글자를 쓰면 소금 냄새 감도는 코끝. 부엌을 물결이라고 받아 적으세요. 파도라 외친다면 통조림으로 되돌아오는. 왜 자꾸 밀려나고 싶지요? 어릴 땐 백오십 살까지 살고 싶었다니까요. 푸른 거목. 마흔아홉 만 잎의 결의. 통조림 햄을 많이 먹으면 그 통조림만큼은 살 거라 믿었던 시절에. 뚜껑 따는 소리에 맞춰 골목이 쏟아지네요. 제가 걸어가고 있어요. 캔에 반사되는 전등 빛으로. 제 유통기한이 그보다 길 줄 몰랐으니까요. 스팸을 썰어 오세요. 적어야 할 말은 모자람이 없고, 명절 세트째로 들고 와도 상관은 없지요. 스팸. 사람의 살빛을 닮은 색인데요. 나의 유언이 당신 팔 위로 자연스레 옮겨 적힌다면. 모든 착각은 의도입니다. 부디 몸에 나쁜 것으로 살아요. 이제 나쁜 것으로만. 두꺼운 팔뚝에 날 선 캔 뚜껑 들이밀면. 자잘한 솜털이 일어나는 소리. 닭살이 돋아나면서 살려고 하는 그 소리. 맛과 죽음은 차라리 같은 것. 이 스팸을 통에 다시 넣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제 유언은 살아 있을까요? 모든 유서는 편지잖아요. 백 년 전 유리병에 담긴 화란인의 유서가 서해 어딘가로 오는 일처럼. 푸른빛 스팸 캔이 건너간다면. 문득 열어버린 까닭으로 시작되는 요리가 있다면.

 

   문학동네시인선 205 변윤제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095-096p



   얼띤 드립 한 잔

   떡볶이 선언문 =崇烏=

    우리는 늘 밤에만 만납니다 11시가 넘어 자정에 이를 때쯤입니다 혹여나 자고 있거나 딴 생각한다면 절대 만날 수 없습니다 거의 자고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늘 이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양쪽 다 슬픔 마음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용기도 가집니다 신의 은총에 의한 굳은 의심을 통해 또 그보다 큰 의혹으로 꼬리에 꼬리를 잇는 자물쇠처럼 무겁게 엇물린 밤만 있습니다 밤을 둘러싼 자연도 공감하고 있는 듯 지독한 잿빛 날씨만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저는 드넓은 들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모든 게 조용하고 깨끗하여 오로지 험난한 산굽이를 돌아 돌아 지난번 무화과를 따며 쓸며 일회용 밀폐 통에다가 담아 주었던 그 따뜻한 손길만 떠올립니다 지금은 자리에 누워 하염없이 밤하늘 천정만 바라보며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풍경만 지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들 불금이라 하는 밤에 풀 위에 아침이슬과 밤 서리로 반짝이며 있지만 헤어질 때 그 우울한 시간이 더 좋기만 합니다 긴 밤 샤워에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떡볶이, 그렇습니다 저녁은 떡볶이가 낫겠다며 함께 먹자던 이야기는 먼먼 옛 신화가 되고 바닷가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옅은 푸른색으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요 사동에 구름은 지워지고 별은 더욱 어둡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땐 싱거운 맥주나 들고 질금질금 짜내는 저 얼굴빛 보며 있는 것도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게 자정에 이르고 우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

    하다하다 스팸까지 등장한 시의 마당이다. 스팸을 쓸고 두부를 쓸면서 김치까지 곁들여 넣는다면 냄비에다가, 뜨끈뜨끈한 밥 한술 문제는 없지요. 그나저나 금요일, 시간은 참 빨리 갑니다. 한 해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지만, 하루를 경주마에 싣고 달리는 기분, 말꼬리에 튕겨 겨우 따라가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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