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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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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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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무의(無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36회 작성일 25-01-01 15:01

본문

아주 평화롭게

식탁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접시 속에 살던 새 한 마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접시 속에서 혼자 살던 새마저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을 나간 것이라고

도리어

미안해했다

― 「가출」


.............................

큰 눈을 가진 사람과

면사무소 간다

단양에 살면서도

단양은 멀고

가는 봄비는

가는 봄비의 행방을 모른다

흰 민들레와 노란 민들레의 효능에 대한 사소한 실랑이 끝에

우리는

사실관계에 집중하기로 하고

손을 잡는다

배후(背後)를 자처했지만

배면(背面)의 슬픔만 지켜봐야 하는 무기력

전입신고를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수선화와 함께

가는 비와 함께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단양에 살면서도

단양은 여전히 멀고

― 「동질감」


.......................................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신은 의자에 잠겨 있었다. 의자 속에 무덤을 파고 부장품이 되어버릴 시를 쓰고 있었다.

훗날의 시집이었다.

요람에서부터 이미 늙어버린 당신에게서

소녀를 꺼내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고집스러웠고 집요했으며 과거형이었고,

결정적으로

의자를 너무 사랑했다.

그랬다. 의자는 믿을 수 없는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체였다.

우물보다 깊고

신앙보다 더 간절한 세계에서 당신을

꺼내주고 싶었다.

무언가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땐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

한 번만 알아 달라는 말을

한 번만 안아 달라는 말로 오인(誤認)하며

손도 잡기도 전에 가슴을 먼저 만졌다. 차가웠다. 썩어 문드러진 소녀의 심장이 묻어났다.

우리는 끝내 관계를 맺지 못했다.

― 「면역력」


...........................................

 

그리고

나는 사랑을 슬픔한다.

나는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짧은 머리칼과 부르튼 입술과 가녀린 목덜미와 초점 없는 눈빛과 연결되어 있다. 구부정한 몸과 검게 변한 오른쪽 가슴과 이지러진 얼굴과 연결되어 있다. 괴사가 진행되기 시작한 발목과 순간순간 거칠어지는 숨결과 연결되어 있다. 한 호흡의 생애와 한 움큼의 세계와 한 페이지의 유서와 연결되어 있다.

내 몸이 슬픔한다는 사실과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요오드 용액의 붉은빛과 투명한 과산화수소수를 사랑한다. 상처를 소독하고 슬픔을 소독하고 생을 소독하는 액체. 부기(浮氣)가 빠지지 않은 너의 몸은 스펀지 같다. 나의 슬픔은 스펀지 같다. 암세포들이 뱉어내는 타액들. 몸 밖으로 분출되는 어둠의 절규, 너의 절규들. 본연의 너는 돌아오지 않고 점점 악화되어 간다. 전이되는 어둠의 세포들…… 매일매일 북받치는 슬픔을 사랑한다. 내가 슬픔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너의 고통을 사랑한다.

나는 슬픔에 중독되어 있다.

― 「오늘의 슬픔」



............................................

 

호박즙 89팩

뜯지 않은 홍삼진액 100팩

오리 & 다슬기 36팩

『항암치료는 사기다』(곤도 마코토 著, 장경환 譯, 문예춘추사)

채송화 씨앗

향마약성진통제 160정

상황버섯 300그램

겨우살이 소량

냉동고 속 오리 한 마리

『굶지 말고 해독하라』(안드레아스 모리츠 著, 정진근 譯, 에디터)

대나무숯 한 가마니

요오드 용액 1L

『뭇별이 총총』(실천문학사) 12권

유고작 수백여 편

인터넷 미납요금 28,350원

이성복

체 게바라(Che Guevara)

아바나

이것이 당신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 「파우치」


..........................................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 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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