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색깔 =배홍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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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색깔
=배홍배
앵두나무에 치는 눈발에서도 비는 뿌렸다 나무의 가지가 터져 붉은 빗방울들 맺힐 때 빗물까지 무슨 색깔의 바람은 불어갔을까 벽에 걸린 가족사진에서 갓난아기 때 죽은 동생이 떨어지고 떨어진 자리를 어머니는 가혹한 빨간 립스틱으로 덧칠했다 아버지가 잘라버린 앵두나무 뿌리에서 덧나는 무화과나무, 핏빛 같은 입술을 피울 때 초록으로 무성한 울타리 아래서 나는 첫 수음을 하고 꿈 밖으로 지워지는 몽정의 흔적에서 아이들은 다시 태어나 서러운 울음을 울었다 어디를 향해도 까마득한 바람의 자리, 자리마다 펑펑 눈 내리는 날
배홍배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 2014)
얼띤 드립 한 잔
앵두나무, 시적 주체로 근원적인 태생을 알리는 시의 밑바탕 소재다. ‘앵’에서 꾀꼬리(鶯)나 앵무새(鸚)를 ‘두’에서 머리(頭)나 무덤(逗) 같은 뜻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앵두는 시적 자아인 셈이다. 눈발은 관심이며 비는 그 관심에 반하는 감정이겠다. 붉은 빗방울과 빗물은 비에서 비롯한 이물질들로 앵두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바람은 비非에서 정正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벽은 한 나무가 자라기에 어떤 장애에 가까운 요소다. 가족사진이 어군의 집합체라면 동생은 시초詩草의 자며 어머니가 이를 깨쳤다면 아버지는 나를 낳은 존재다.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종의 성격을 지닌 어떤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개체다. 앵두나무를 보다가 빨간 밑줄(립스틱)도 쳐가면서 어느새 미흡한 것이 발견되고 여기에 자르고 보태다가 또 아닌 것은 떼어내다 버리는 일련의 과정들 이러한 것은 모두 수음으로 비유한다. 꿈이 이상향이며 목적지라면 몽정은 그야말로 습작의 단계이자 퇴고의 과정이겠다. 앵두나무가 삼각형이라면 무화과나무는 네모, 핏빛 같은 입술이 흙손을 잘 다루는 미장공을 떠올리게 한다면 초록으로 무성한 울타리는 각이 다른 여러 타일 조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아무튼, 이러한 조각들로 맞춰가는 목욕탕 바닥 위에서 멋지게 샤워하고픈 마음마저 샤워하면서 긴 지렛대 하나 요리조리 만져보는 시간까지 축축 늘어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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