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보 씨의 일 =권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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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보 씨의 일
=권라율
진해가 보이지 않는다 곧 출발 시간, 시계가 심상보 씨를 남의 일처럼 본다 일단 내려서 저녁 식당을 찾는다 진해가 없다 없다 저만치 금빛으로 반짝이는 진해를 향해 손을 흔든다 뛴다 뛰다가 뒤에서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이름을 주워 준다 점점 똑똑해지는 진해를 보며 심상보 씨는 다시 표를 끊는다
진해요? 진해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어요
귀에서 재깍재깍, 시계는 아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고 있다 어떤 진해가 진짜 진해일까 심상보 씨는 중얼거린다 북경이나 태평양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진해는 열심히 가고 있다
심상보 씨는 오늘도 진해를 본다 어쩐지 진해는 남몰래 피를 흘리고 있을 것 같다 버찌를 짓이기며 여기저기 벚꽃 팡파르가 울리다가 차표가 풍경을 놓친다 진해를 믿기로 한다 네 생각이 난다 마산에서 내려야 할 것 같은 기분,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요청된 문을 박차고 싶다 자리에서 일어서지 좀 마세요, 산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바닷물이 끓어 넘치다가 태양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눈발이 내렸다가 그쳤다가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내려요, 안내방송에 허둥지둥 심상보 씨, 한낮은 덥고 지나가는 개 한 마리 없다 소변을 누고 나오니 덜덜거리며 출발을 기다리는 배기통
진해, 진해
매초마다 오고 있다
경북 영양 출생
202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얼띤 드립 한 잔
진해는 목적지며 하나의 이상향이다. 심상보라는 특정 인물로 쓴 시지만, 불특정 다수를 지목한다. 그러니까 이 시를 읽는 이는 누구나 ‘심상보’다. 이름도 참 재밌게 썼다. 마음을 덮는 그 무엇처럼 말이다. 진해가 내가 갚아야 할 대출금이라면 심상보 씨의 일은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한 부지런한 노동에 신경을 써야겠다. 하지만, 시계는 심상보 씨를 남의 일처럼 본다. 시계가 심상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심상보가 그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진해에 가는 심상보가 있고 대출금을 갚아야 할 심상보만이 있는 것이다. 오로지 금빛으로 반짝이는 진해, 심상보는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며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나름은 뛰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늘 제자리다. 그럴 때마다 선명한 이름을 주워다 주듯 내 머리에 각인하는 문자메시지는 엄연히 진해의 통지서고 언어다. 진해? 하지만 진해는 멀었다. 그곳까지 가야 할 명분은 있지만 가는 방법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 방향을 찾지 못한 심상보만 있다. 그러므로 북경에 가는 것인지 태평양으로 가는 것인지 진해는 진해고 진해라고 믿고 싶은 발걸음만 있다. 시어로 쓴 북경도 그렇고 태평양도 참 의미가 있어 좋다. 물론 지역명과 오대양 중 하나지만 시가 나가는 방향과 시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처소와 바탕을 이루는 것이니까! 뒤에 나오는 ‘남몰래 피를 흘리고’에서 피와 벚꽃 그리고 팡파르, 차표, 풍경 같은 시어도 피상적으로 볼 일도 아니다. 여러 가지 떠올릴 수 있는 배경을 실어다 준다. 진해에 대한 어떤 이미지 가령 하얗게 와닿는 대출금 같은 것, 그것만 생각해도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벚꽃처럼 팡파르가 울리면 온몸이 떨린다. 마치 사경을 헤매는 것 같다. 마산이라는 시어도 좋다. 말 마馬에서 언어의 그 말이라는 개념과 겹쳐 오른다. 온갖 무성한 말들로 이룬 산 하나를 짊어지고 간다. 그래서 더욱 세속적이지 못하고 염세적이거나 고립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저 멀리 보이는 항구, 항구가 항구로 보이지 않는 이 심상보, 한낮은 여름처럼 열려 있고 다소 항변이 아닌 소변을 널어놓고 마는 심상보 덜덜거리며 출발하는 저 배기통에 진해만 있다. 매초 신경만 자극한다. 물론 여기서 대출금이라는 어떤 예시를 들었지만, 비만에 대한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심상보도 있을 것이며 어떤 닿지 못하는 꿈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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