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을 믿어보는 생활 -마당에 핀 개나리를 중심으로 =송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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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을 믿어보는 생활
-마당에 핀 개나리를 중심으로
=송재학
노란색은 단순해지려는 발자국, 이건 부탁이 아니야, 노란색이 선명해서 개나리 따위는 금방 잊어버린다 꽃을 삼킨 별자리부터 믿는다 나는 어디까지 노란색일까 얼룩덜룩한 수화를 하는 노란색, 다하지 못한 말, 진화론을 일깨우는 노란색, 꽃샘추위는 노란색이라는 믿음을 시작한다 개나리 주위를 배회하는 엷은 유령조차 노란색이다 그리하여 자꾸 달라지는 노란색의 되새김으로 윤회조차 믿게 된다 멀리서 켜지는 불빛 같은 노란색은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 있다 오줌 줄기는 노란색, 노란색 가루는 몸에 묻진 않지만 우울과 우연으로 노란색은 나에게 닿는 수혈, 봄을 믿으니까 노란색이 내 안에 고여야 하는 울음인 것도 알겠다 그건 표정이어야 할까 노란색과 나 사이에 팽팽해진 실 끝을 당겼더니 낮달의 무게가 도착했다
송재학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문학과지성사, 2025)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여기서 노란색은 편협한 마음을 상징한다. 영양부족이나 핏기없는 얼굴만 노란 게 아니라 사고가 짧은 것도 노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노란색은 단순해지려는 발자국이라 정의한다. 시를 처음 대할 때 마음은 대체로 노랗다. 의미 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노란색이 선명해서 개나리 따위는 금방 잊어버린다. 여기서 개나리는 식물이다. 이미 심어놓은 나무라고 친다면 꽃은 그 하나하나가 될 것이다. 꽃을 삼킨 별자리부터 믿는다. 그 꽃을 읽은 자아는 자신만 믿는다. 꽃의 세계가 정상이라면 그 반대쪽은 유별난 것은 분명하겠다. 그러므로 개나리와 별자리는 대조적이다. 별자리 즉 나는 어디까지 노란색일까? 하며 진술이 시작된다. 마치 스무고개를 넘듯이 얼룩덜룩하게 수화하고 이어 말 다 하지 못한다. 결국, 생물의 다양성과 적응성을 형편에 맞게 끼워 맞춰보는 노란색 이는 곧 진화론적 관점이 된다. 더 나가 소처럼 되새김과 불교不交의 교리交理에 소통을 연다. 정말이지 노란색은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 있다. 믿고 싶은 단어와 잘 믿는 단어 사이에 있다. 오줌 줄기는 노란색, 배설은 늘 편협하다. 노란색 가루는 몸에 묻진 않지만 단순한 시어는 감출 순 없지만, 우울과 우연으로 노란색은 나에게 닿는 수혈이다. 우울과 우연은 오른쪽 세계관으로 삶을 대변한다. 시뿐만 아니라 작품을 이룬 세계는 작가의 삶이 꽤 큰 밭을 이루기 때문이다. 봄을 믿으니까, 시관詩觀을 얻는 일은 노란색의 울음에서 시작하는 것, 그 표정이야말로 팽팽한 줄 달리기가 아닐까! 노란색과 나, 개나리와 별자리 그 양 실 끝을 팽팽하게 당겨본다. 뭐라도 떨어질 때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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