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불행 =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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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불행
=이기성
여름에 대해 생각하면 뭔가 검은 감정이 따라와요. 마당엔 아직 붉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고, 나에겐 모르는 친척들이 많지요. 회색 거미처럼 독신의 친척은 혼자 놀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죽습니다. 여름엔 노랗고 붉은 꽃잎들 비와 태풍도 지나가고 그건 친척이 싫어하는 날씨였지만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혁명이나 슬픔이나 시 그런 것처럼 여름에 대해 말하면 그건 먼 친척의 이야기 같지요. 계단에 앉아 땀을 닦는 동안 여름이 한창이고, 텅 빈 거미줄 흔들리고 똑똑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우거진 풀이 기이한 냄새를 피우는 동안 나는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가고 더운밥을 먹고 가끔 시를 썼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여름의 불행이라고 말하지요.
이기성 시집, 『감자의 멜랑콜리』 (창비, 2025)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겨울 눈물
겨울 발바닥 핥는 일에 어떠한 감정은 없어요 얼음 밑 엿보다가 새파랗게 오른 상처 보며 다만 소원을 빌어요 나는 沌(純)이 없어요 마당은 여전히 고드름 속에 고름이 피듯이 고름 속에는 고드름이 열리듯이 알록달록한 꿈만 꾸어요 비 내린 흔적이 남은 숲이라 여기며 살지요 침묵에 앉아 엄지를 빠는 동안 겨울은 여전히 한창이고 내 입은 다만 얼얼합니다 설탕이나 복권이나 라면 같은 자폐에 둥둥 떠 가는 은신처에 데려다줄 사람 있을까요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말간 눈만 있을 뿐이에요 그래요 고요 속에 핀 저 까만 이불에서 단추만 놓고 울타리 너머 눈발만 낚지요 죽음이 깔린 눈물에 달문을 달고 천국을 열며 빵을 만들며 그대 보는 앞에서 겨울만, 겨울만 해도 긴 부츠만 신을게요 그냥 눈물만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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