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가죽 자루 =이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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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가죽 자루
=이사과
어제 꾼 꿈이 너덜너덜해 수선 가게를 찾았어. 늙은 수선공은 균형이 무너졌다며 낡은 상자를 뒤적였지. 상자 속엔 사람들이 버리고 간 꿈들이 가득했어. 그는 보랏빛 조각을 구두에 대어 보더니 어느 도망자의 밑창인데 거의 새것이라며 내 발과 잘 어울린다고 했어. 수선공은 발바닥에 달라붙은 잠꼬대를 사정없이 뜯어냈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통증도 잠시, 타인의 꿈을 내 발에 대고 못질을 시작했지. 접착제 냄새와 낯선 기억들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어. 가게를 나섰을 때, 발은 평소보다 높게 떠 있었어. 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몰라보는 표정을 짓더라고. 왼발을 디디면 모르는 사람 목소리가 새고 오른발을 디디면 울음소리가 들렸어. 몸은 분명 집으로 향하는데 밑창은 자꾸 낯선 골목으로 들어갔지. 웅덩이를 지날 때면 바닥에 눌린 악몽들이 입을 벌렸어. 내가 걷는 것인지 밑창이 나를 신고 걷는 것인지 아리송했지. 집에 도착해서야 가죽 속에 수선공이 들어 있는 걸 알았어. 창문에 어른대는 그림자에 노인의 구부정한 형상이 겹쳐졌어. 다음 날 가게를 찾았지만 수선집은 보이지 않고 밑창에 붙은 기척 때문에 그림자를 질질 끌며 언덕을 올라야 했어. 기척은 내 혈관을 타고 올라 점차 분홍빛 살점으로 변해갔지. 아침이면 낯선 가죽 자루 하나 코랑코랑 골고 있어.
분홍 가죽 자루=이사과 시인
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마음을 구두에다가 비유해 본다. 남에게 보여줄 만한 ‘마음’은 그렇게 쉽게 탄생하지는 않는다. 늘 꿈에 그리는 이상향인 만큼 몇 번의 잠꼬대 아니 수없이 잠을 헤쳤을 법도 하다. 보이지도 않고 본다고 보는 것도 아닌 그 세계에 닿는 일은 어쩌면 그것을 목표로 삼는 이에게는 고통이다. 마치 나는 세계에 이름난 트러이더처럼 성공할 거야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실제 매매를 하지만, 실상은 녹녹지가 않다. 깨지고 바닥에 부딪혀 피를 드러내기도 하고 빈 털털이로 마음은 이미 다 손상되었을 때쯤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심히 깨닫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하는 것처럼 그때 찾아오는 갈등은 삶과 죽음의 기로다. 여기서 오른쪽 삶을 택하는 이도 있겠지만, 왼쪽으로 기우는 선택도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주위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마음이 참 아프다. 몇 년 전에 이야기다. 기획사를 운영했던 모 대표님 언뜻 지나간다. 아침이면 눈살 찌푸리며 모니터 창만 꿰뚫고 있었던 결과는 어찌 되었든 승률로 보면 솔직히 나보다는 나았다는 사실, 수십 번 아니 수만 번의 실패가 가져다준 패배감은 세상 바라보는 눈빛 또한 다르다는 것. 우울과 무력감에 젖어 바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 기준은 늘 편파적이지만, 깨지다가도 피를 본다고 해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어야겠다. 이왕지사 찔러보면 안다.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과는 볼 필요가 없다. 과정에 대한 도전과 성취만 있을 뿐이다.
굳이 시어와 문장을 뜯지 않아도 시의 여정을 참 잘 다루었다. 잘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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