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주의보 =서영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파랑주의보
=서영식
아버지가 액자를 걸었다 바다는 반듯하게 잘려 있었으나 파도가 높았다 파도는 높은 데서 멈추어 있었다 파도 위에 먼지처럼 노란 달빛이 쌓였다 그건 바다가 아니라 파도나 달의 그림이라 부르는 편이 옳았다
바다를 벽에 걸었을 때 지하 셋방에 처음으로 창이 생겼다 그 후로 내겐 액자를 창이라 부르는 버릇이 생겼다 파도는 창 밖에서 방안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 좋았다 창 밖에는 늘 파랑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으므로 배 한 척 지나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청거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를 때리다가 그만 창을 건드렸다 바다를 막고 있던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굳어있던 파도가 부서져 내렸다 파도에 쌓여있던 달빛도 무너져 내려 방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우리는 파도에 뒤엉켰다 창에서 기러기 떼가 날아들어 끼룩끼룩 울었다 만조였고, 물은 짰다 어머니는 어디론가 쓸려가고 없었고 아버지는 쓰러져 있었다 깨진 유리가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엎어진 우리 위로 바다는 계속 넘어오고 있었다 눈을 뜨면 절정이었다
창에 다시 유리를 끼웠다 바다를 다 쏟아낸 액자에 다시 바다가 차고 달이 차고 파도가 차올라서 평온했으나 언제든 파도는 우리를 삼킬 태세였다 그 후로도 달이 차기도 전에 바다는 자주 범람했고, 파도는 자주 허물어졌다 그 방에 한번도 파랑주의보가 해제된 적이 없었다
서영식 시집 『간절한 문장』(애지, 2009)
서영식 1973년 부산 출생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간절한 문장』 에세이집 『툭하면, 인생은』 『흔들리는 날에 흔들리는 나를』 등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숲에 거닐었다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햇볕에 거멓게 그을린 거미가 있었다 밤이면 달빛을 머금고 거미줄 치며 누구도 예견치 않던 바람을 낚았다 바람의 부스러기가 흡사 자른 달빛을 한입 문 듯 오글거리다가도 이내 뱉어버렸다 왠지 달갑지 않아 더는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푸석푸석한 낙엽들 퀴퀴한 냄새가 오른 이 숲이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았다 침묵이 한동안 지배했던 흔적이 뚜렷했지만 어떤 함정을 파놓았을지 수년이 지난 어느 시기에 거미줄을 걷었을 때 경찰은 그곳에 없었고 탈주범만 도주한 거처럼 다리에 힘이 없었다 우리는 전고에 없던 국난이 분명하였으므로 피와 눈물로 숲의 역사를 기록하기로 했다 말똥가리가 달빛을 등지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헤매다가 자신의 실체에 몸서리치며 어깨를 조져야 하는가? 눈을 뜨면 이름도 모르는 불 속이었고 두 발만 태우고 있었다 순록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밟은 이파리를 뭉개버리고 발굽에 낀 자갈을 머금은 채 내달리는 숲은 거미의 보금자리, 왕소나무 숲이 우거진 잡목 사이에는 지금도 산짐승들이 나와 울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