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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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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29회 작성일 15-10-21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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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첫 키스, 첫 밤




한 순간 태풍에 휩쓸린 듯 엄마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던 은서는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꿈 속 같은 상황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먹먹해지고, 무지개를 쫓았던 것처럼 낯선 곳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 사람이 엄마였나? 은서는 사라져버린 승용차처럼 불불명해지는 엄마와의 엇갈린 상봉의 기억으로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분명히 엄마가 틀림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처절한 상실감이 치밀어 올라왔다. 만나게 되는 날에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아서 엄마가 그리울 적마다 가슴속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두웠었다. 하지만 그리움이 덮치고 가면 잔해처럼 원망과 미움이 엄습했다. 그 때, 언젠가 만나게는 되겠지만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한이 그녀 안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런데 엄마를 보자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만이 그녀를 끌어 당겼었다. 은서는 허탈감에 이어 찾아오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고 로비로 돌아왔다.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것이라면 또 오늘처럼 우연히 만날 수 있으리라. 은서는 자신을 위안했다.

“무슨 일이에요?”

로비에 내려와 있는 도현을 보고 은서는 흠짓 놀랐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 난처한 듯 서 있었는데, 은서와 눈이 마주치자 굳은 얼굴을 풀었다.

“미안해요.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은서는 혼란스런 눈빛의 도현을 보고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6살 때 집을 나간 엄마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얘기까지 할만큼 서로 낯이 익은 관계도 아니었고, 왠지 수치스러웠다.

“아, 그랬군요.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중도에 멈추고 내려버리자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려와 보니 도망간 건 아닌 것 같더군요. 그래, 그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도현이 곧장 뒤쫓아 내려와 황망히 로비를 뛰어다니는 모습과 목표물을 찾아 황급히 호텔 밖으로 달려가는 과정을 지켜본 듯 말했다.

“마, 만났어요. 다행히요.”

은서는 헛걸음이었다고 대답하는 것보다 이 편이 상황을 얼버무리기가 나은 것 같았다.

“급히 갈 데가 있다네요. 학교 친구거든요.”

 

 

“친구요? 어떤 친구길래?”

도현은 은서의 해명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중학교 친구요. 엘리베이터에서 얼핏 보았는데, 그 친구가 맞는 것 같아서……. 졸업하고 연락이 끊겨 너무 반가웠거든요. 미안해요, 놀랐죠?”

도현은 애써 수긍하는 것 같았지만 약간의 질투심은 어쩔 수 없는 듯 씁쓸해 한 표정이었다.

“당황했어요. 날 팽개쳐버리는 그 순발력에.”

“팽개쳐버린 건 아닌데? 상황이 급박해서 그만.”

“좋아요. 이해하죠. 대신 여기에 팔 끼세요?”

도현이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은서 쪽으로 벌였다.

 

 

“내 입장이 어떨 것 같아요? 자, 어서 끼어요? 직원들이 보고 있습니다. 승강기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당신이 로비에 내려 와 이상한 짓을 하는지 의아해 하고 있을 겁니다. 만회해 주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갑자기 도현이 정색을 하고 나오자 은서는 어쩔 줄 몰랐다. 그의 투정에 일리가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팔짱을 끼어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것도 예행 연습인가요?”

“아니요. 실전입니다.”

“예?”

 

 

“말 그대로 실전이라고요. 은서 씨가 내키면 끼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끼어 주지 마세요.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 몫인 것 같군요.”

“배짱이네요, 아주?”

은서의 대꾸에 도현이 피식 웃었다.

“내 입장 곤란하게 한 건 은서 씨잖습니까? 해서 내가 칼자루를 쥐어 본 겁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죠. 그래서 난 이 기회를 이용해 보고 싶네요.”

“기회라뇨?”

 

 

“나 철판 깔 각오 되었어요. 은서 씨가 팔짱을 끼어 주지 않아, 내일 직원들 사이에 괴소문이, 즉 여자 뒷꽁무니 쫓아내려와 매달리더라는 소문이 펴져, 오락거리로 씹히게 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건 부탁이 아니라는 소리죠. 나와 진심으로 사귈 의향이 있으면 여기에 은서 씨 팔을 끼시고, 저녁 얻어먹고 땡 칠 생각이면 나더러 앞장 서 걸으라고 명령하시지요?”

은서는 가라앉았던 기분이 도현의 억지 소리에 상쇄되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직원들 소문을 빙자해 내 마음을 떠보는 수작이 아니고 뭐겠는가.

“재미 있네요, 도현 씨. 까짓것 팔짱 끼어 드리죠. 다만 사과의 의미라는 거 잊지 마세요.”

은서는 짐짓 그가 요구하는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단단한 팔에 느슨하게 자신의 팔을 감았다. 주저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낯선 상황을 극복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은서 씨!” 

도현이 짓궂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의 팔짱을 끼고 보조를 맞춰 걸음을 내딛던 은서는 간혹 끼어 주었던 강혁이와는 달리 도현의 팔과 옆구리에선 이상야릇한 느낌이 일어나자 내심 당황했다. 손을 잡을 때보다 옷으로 가려진 부위에서 전해지는 정체불명의 열기에 온 몸이 화끈거렸다. 은서는 생소한 그 감정을 떨쳐버리려 애를 써야했다.

“이제 그만 팔장 풀어도 돼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은서는 팔을 빼내며 말했다. 아까와 다르게 엘리베이터가 위험스러 보였다. 도현이도 자신과 같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일까.

“예, 수고했어요.”

 

 

“웬 수고? 이럴 때도 그런 말 쓰나요?”

“그렇게 물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하.”

“예?”

“은서 씨가 수고한 것이 아닌데 라고 말할 줄 알았다고요.”

“이런! 괜한 소리했네.”

“하하. 은서 씨 마음 알았으니, 이제 우리 한 단계 올라서야죠?”

“그건 또 무슨 말이데요?”

“아무도 없는데 포옹 한 번 하자고요?”

도현이 농담조가 다분한 어조로 말해서 은서는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쿡 때렸다.

 

 

“이제 보니, 모두 수작이었어! 나 내릴래요!”

은서는 말장난이라는 느낌에 짐짓 아까처럼 다음층 버튼을 누르려고 팔을 뻗었다.

“이건 백퍼센트 농담입니다. 그러니 내릴려면 어서 내리시지요.”

은서는 도현을 흘겨보며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쿡 쿡 때렸다. 엄마를 놓치고 찾아든 가슴속 아픔이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도현이 굽힌 팔을 내밀자 은서는 짐짓 한숨을 내쉬곤 팔짱을 끼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도현이와 그의 옆의 은서를 쳐다보느라 바빴다.




 

 

도현이 주문해 놓았다던 송아지요리가 메인 음식으로 차려진 테이블에서 은서는 편안한 식사를 했다. 도현이 이것저것 챙겨 주며 자신이 경험한 맛을 은서도 느껴보라며 권했고, 은서는 그가 권하는 음식을 음미하며 느낀 맛을 말해 주었다.

직원들은 소리없이 다가와 음식을 리필했는데, 아무리 호텔 기조실장 테이블이라지만, 너무 빈번하게 왔고, 다녀갈 적마다 꼬박꼬박 허리를 굽히는 것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데서 일하려면 실장님한테 잘 보여나 되나 봐요?”

식사가 끝나자 즉시 테이블이 치워지고 커피가 날라져 왔다. 커피를 가져 온 여직원 둘이 양편에서 도현이와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은서가 물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여기 전직원들이 돌아가며 오는 거 못 느꼈어요. 연구 대상이었던 남자가 또 다른 연구 대상이 되나 봅니다, 하하.”

하긴 리필하러 온 직원들이 매 번 얼굴이 다른 여직원들이었었다.

“그게 아니고 내가 연구 대상일 것 같네요. 내시 일벌레 딱지를 뗀 여자가 어떻게 생겨나 구경하는 것이 맞는 얘기겠죠?”

“그렇군요. 불편하면 그만 나갈까요?”

“아니요. 이거 다 마시고요.”

은서는 따가운 시선들을 호텔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꼈던 터라 무시하고 있었었다. 때문에 그 점이라면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저기 말이죠…….”

커피를 홀짝이던 도현이 입을 뗐다.

“예, 말하세요.”
“아까 농담처럼 말한 거 가볍게 흘러버리지 마세요?”

“무슨 농담을 했는데요?”

“오래 이런 만남 유지하자는 내 마음 비췄잖아요?”

“아, 그거요?”

“예, 그거 말입니다.”

“난 벌써 대답한 걸로 아는데요. 둔하지 않다면 이런 질문 필요치 않은 거 같은데.”

“하하, 제가 좀 둔합니다.”

“그런 것 같네요.”

 

 

“하하, 실은 느꼈습니다. 단지 확인해 보고 싶었죠.”

“왜요?”

“왜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 나도 방금 말한 것 같은데요.”

“호호호, 저도 좀 둔하답니다.”

“하하, 그런 것 같네요.”

“실은 알고 있어요. 단지 확인해 보고 싶었죠.”

두 사람은 합창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기조실장이 웃는 것을 처음 보는 레스토랑 직원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한 표정들이었고, 그 중 몇 사람은 쓰려지는 시늉을 냈다.  




“저기 다 세워주면 돼요?”

도현의 차를 타고 동네에 이르자 은서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차를 세울 장소를 가리켰다. 그와 함께한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처럼 아쉬움이 짙게 다가왔다. 누구를 만나, 휴식를 취한 것처럼 안락하고 달콤하게 지낸 기억이 별로 없는 은서였다. 강혁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그녀를 웃게 하고 우러러나와 농담을 건네게 하고 모든 시름을 아득히 밀어내 버리는 사람은 도현이 처음이었다.

“집 앞까지 가죠?”

도현이 세우라는 장소를 지나쳐 골목 안으로 차를 몰며 말했다.

 

 

“그냥 세워 줘요. 나 사는 데 알면 실망할 거에요.”

은서는 생각지도 못한 짓을 감행하는 도현이 왜 싫지 않은지 모를 일이었다. 동네가 저층지대라 장마철이면 지하방에 물이 찼다. 그로 인해 방값이 싸진 동네엔 서민들이 삶의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은서는 옥탑방을 구하기 전까진 지하셋방에서 살았었다. 하수구를 통해 역류한 탁한 물이 키 높이까지 차버린 방에 세간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물이 빠져 악취가 진동하는 방을 청소하고 못 쓰게 된 가재도구를 내다버리며 은서는 이를 악물었다. 없는 돈을 아끼고 아껴 작년에야 겨우 옥탑방을 구할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방에 누웠을 때 고층아파트에서 사는 이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은 기쁨과 성취감이 은서를 새벽까지 깨어 있게 만들었다. 이제 여름이 오면 더위보다 물 난리부터 걱정할 일은 없어 진 것이었다.

 

 

“싫은데 어떡하죠?”

“예?”

“아무데서나 차를 세울 수 없다네요. 이 차는 은서 씨 집 앞에서 세우게 되어 있다네요.”

“우격다짐 하는 게 도현 씨 평소 모습은 아니겠죠?”

“필요할 때만요. 어디쯤이에요? 내려만 주고 갈 테니, 부담 갖지 말아요.”

오는 길에 은서는 도현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우게 된 도현이 은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 채 자기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 후 은서 휴대폰에 찍혀 있는 자기번호를 저장한 후 돌려 주면서 말했다.

 

 

“오 예! 라는 이름이 뜨면 바로 납니다. 꼭 받으세요?”

확인해 보니 정말로 오 예! 라는 이름이 적힌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웃기는 사람이 내시 일벌레란 별명은 왜 붙었을까, 은서는 소리없이 웃으며 의아해했다.

“도현 씨 휴대폰에 저장된 내 이름은 뭐예요?”

“아, 그거요? 음, 도끼 입니다.”

“도끼 라뇨?”

“내가 찍은 여자란 소리죠, 하하.”

“기분 나쁘네, 정말! 아무리 찍었다고 해도 도끼가 뭐예요, 도끼가? 살벌하게서리.”

“그럼 바꾸죠. 올가미 라고.”

“올가미요? 아이 짜증나려고 그러네.”

 

 

“그렇담, 만세 라고 하죠, 하하. 더 이상 양보는 없습니다.”

“만세요? 그건 좀 괜찮네요. 오 예! 하고 좀 공평해 보여서.”

“실은 만세 라고 저장해 놓았답니다, 하하.”

차가 골목 안쪽으로 속도를 줄여 달려가고 있었다. 은서는 깔끔하게 단장될 리 없는 골목 양편의 작은 가게들을 바라보며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 그는 은서라는 여자가 넉넉하지 않은 집 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은 지 오래 된 4층짜리 연립주택 옥탑방에서 산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은서는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었지만, 왠지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 듯한 울적함이 찾아들자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도현이란 남자와 교제라는 것을 하게 될 것 같으니 이참에 염려되는 것을 다 밝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저기 저 집이에요.”

낡은 연립주택이 늘어서 있는 끝 집 옥탑방이 은서의 주거지였다. 바로 옆엔 방음벽이 솟아올라 있고 그 너머엔 지상 전철역으로 은서의 집에서 보면 철로와 플랫폼이 한 눈에 들어왔다. 몇 분 간격으로 의정부와 서울을 오가는 전철 소음에 한동안 고생했었지만 지금은 이골이 났는지 거의 무신경해졌다.

“운치 있네요, 이 동네.”

도현이 방음벽에 못 미쳐 차를 세우며 비하하는 건지 말 그대로 정겨운 동네라고 느끼는지 헷갈리는 어조로 말했다.    

“난 이 집 옥상에서 산답니다. 부동산에선 옥탑방이라고 하더라고요.”

은서는 자격지심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도현이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구경 좀 시켜줄래요? 은서 씨가 사는 집 궁금합니다.”

도현은 그녀가 사는 환경에 맞닥뜨렸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궁금할 거 없어요. 그리고, 보면 기절할 거예요. 내가 좀 게으르거든요.”

은서는 내심 안도하며 도현이란 남자에게 마음 한겹이 더 열리는 것을 느꼈다.

“하하, 겸손하면 반대 생각을 하게 한다는 거 아는 것 같아요. 저 높은 곳에서 혼자 사는 건 아니죠? 누구랑 사세요? 설마 남잔 아니겠죠?”

도현이 웃는 눈으로 물었다.

“실은 나 혼자 살아요. 부모님은…… 안 계세요.”
엄마 생각에 왈칵 목이 메이자 은서는 마른침을 힘껏 삼켰다.

“시골에 계시나 보군요. 무섭진 않아요?”

 

 

“시골에도 안 계세요. 나, 고아원 출신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