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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물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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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64회 작성일 25-11-27 11:27

본문

월정사 물확

                                     /장승규

 


오대산 산사불유각 안에
물을 받는 돌확

그 수행이 밤낮으로 놀랍다


비우는 법을 알아
제 작은 그릇을 가득 채운 적이 없다


밤이 들자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졸졸
속세로 흘러나가는 염불소리만 남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염불은 더욱 낭랑해지고 


한 번쯤은
부처님 젖으로 채워지고 싶은 동자승

월정사 초승달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본다


내 안에 물확

졸졸

이 밤 따라 반야경 읊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서재에서  2025.11.25)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월정사 물확〉 감상

장승규 시인의 「월정사 물확」은 오대산 산사의 밤을 배경으로, 불유각 안에 놓인 작은 돌확 하나를 통해
인간 내면에 깃든 비어 있음과 수행의 깊이를 고요하고도 치밀하게 비추어내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확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비움 그 자체가 하나의 길이 되는 존재로 서 있다.

시의 첫머리에서 물확은 “오대산 산사, 불유각 안에 / 물을 받는 돌확”으로 등장한다.
이 위치는 결코 우연한 배치가 아니다.
불유각은 이름 그대로 ‘불유(佛乳)’, 곧 부처님의 젖, 자비와 깨달음의 근원이 흘러나오는 자리를 뜻한다.
그 안에 놓인 물확은 대상이라기보다 수행의 중심부에 들어선 마음의 그릇으로 읽힌다.
그리고 이 물확은 말미에 이르러 “내 안에 물확은”이라는 구절로 되돌아오며,
불유각의 물확과 ‘내 안의 물확’이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자리로 겹쳐진다.
물확은 더 이상 밖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서 있는 마음의 형식 그 자체로 전이된다.

물확은 “제 작은 그릇을 가득 채운 적이 없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 비어 있음은 외부로부터 채워지지 못한 결핍이 아니라, 스스로 가득함을 택하지 않는 절제와 선택의 비움으로 읽힌다.
가득 채워질 수 있음에도 채우지 않는 이 절제는 물확을 단순한 사물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수행의 결 안에 들어선 존재로 만든다.
이 의지적 비움이야말로 이 시 전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밤이 들자 물확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졸졸 / 속세로 흘러나가는 염불소리”뿐이다.
이때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염불과 나란히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돌확이 읊는 염불처럼 읽힌다.
자연과 수행이 서로 겹치는 순간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이미 수행이 되어 버린 이 장면에서,
사물과 인간, 소리와 독경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겉으로는 물확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 소리는 오히려 더 또렷한 법문이 되어 산사 전체를 조용히 적신다.
사라짐 속에서 드러남이 완성되는 이 역설의 장면은 산사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시선을 고요히 보여 준다.

이어 등장하는 초승달은 단순한 풍경의 장식이 아니다.
월정사(月精寺)라는 이름이 지닌 뜻—‘달의 정기가 머무는 절’—을 떠올리면, 초승달은 시의 장소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비추는 핵심 이미지가 된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는” 초승달은 세상을 심판하는 눈이 아니라, 비어 있으나 깨어 있는 존재로서 세상을 조용히 살피는 관조의 시선이다.
하늘의 초승달과 땅의 물확은 각기 ‘아직 채워지지 않은 형상’으로 서로를 마주하며 시의 정서를 은근하고도 단단하게 받쳐 준다.

동자승의 등장은 이 시의 정서를 가장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한 번쯤은 / 부처님 젖으로 채워지고 싶은 동자승”이라는 구절은 욕망의 토로가 아니라, 근원적 위로와 구원의 갈망을 품은 고백으로 읽힌다.
불유각의 ‘불유’가 곧 부처님의 젖이라는 상징과 겹쳐지면서, 이 동자승의 바람은 단순한 개인적 소망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향하는 근원의 자리로 확장된다.
이 순간 물확·동자승·시인 자신은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마음의 서로 다른 얼굴처럼 조용히 포개진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내 안에 물확 / 졸졸 / 이 밤 따라 반야경을 읊고 있다”는 외부의 돌확은 내면의 돌확으로 완전히 전이되고,
비어 있던 그릇은 마침내 소리로 수행을 시작하는 자리로 바뀐다.
이는 결핍에서 충만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비어 있음 그 자체가 곧 독경(讀經)의 몸이 되는 순간이다.
이 시는 이제 성찰에 머물지 않고 **행(行)**으로 완성된다.

결국 「월정사 물확」은 비어 있음이 부족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 둔 채 가장 깊은 곳에서 경을 읊는 마음의 형식이 되는 과정을 그린 시라 할 수 있다.
작은 돌확 하나로 시작한 이 시는 동자승을 지나, 달을 지나, 마침내 시인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고요한 수행의 자리에서 끝난다.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 안에도 저 어두운 산사에서 조용히 반야경을 읊고 있는 ‘작은 그릇 하나’가
이미 놓여 있는 듯한 깊고도 오래 남는 여운이 고인다.

장승규님의 댓글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The Water Basin of Woljeongsa
                                                                            /Sankei Jang


In the mountain temple of Odaesan, inside Bul-yugak,
a stone basin that receives water—
its silent practice, day and night, is wondrous.

Having learned the way of emptying,
it has never filled
its small vessel to the brim.

When night arrives,
its form melts into the dark,
drip, drip—
Only the sound  is left as chanting,
flowing out toward the worldly realm.

As the night grows deeper,
the chanting rings ever clearer.

Once,
a novice monk,
longing to be filled with the milk of the Buddha.
The crescent moon of Woljeongsa
looks down
with eyes gently narrowed.

The water basin within me—
drip, drip—
along with this night,
it recites the Heart Sutra.

(At the Study in Johannesburg, 2025.11.25)

김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부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조용하고. 질박하고
참선해야 할 것 같은 성찰의 시간을 느낍니다.
잘은 모르지만 영문이 더 깊이있는 느낌을 줍니다.
혹, 시간이 되시면 저하고
한/ 영 시집 출간하시면.......

저는 거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만.....
As the night grows deeper,
the chanting rings ever clearer./ 이 부분은 매주 좋은 선, 문답의 맑음과 같이
감상의 묘미가 좋습니다

매우 잘 감상하고 갑니다.

장승규님의 댓글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김부회 시인님!
좋은 생각이십니다.

남제는 혹시나 싶어
본인이 쓰는 시나 단편소설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언젠가
시집이나 단편소설집으로 엮어내길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겠지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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