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리 홍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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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리 홍매화
(이육사 '광야' 시비 앞에서)/장 승규
더러는 가고 아니 오더라만
부지런한 계절은 벌써 다시 왔다
계모 같은 얼음장 아래에서 자란
봄
아직 다 녹지 않은
쌍화리 계곡에 홍매화로 피어서
가고 아니 오는 님을 목 놓아 부른다
산야에 부르는 소리는
멀리 가는 듯
바삐 메아리로 돌아오는데
백마 타고 떠난 초인은 가고는 아니 오고
시비만
덩그러니 높다
(요하네스버그 서재에서 2026.03.09)
*쌍화리: 경북 안동 도산면 쌍화리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홍매화가 부르는 이름 — 〈쌍화리 홍매화〉를 읽고
장승규의 시 〈쌍화리 홍매화〉는 한 편의 풍경시로 시작하지만, 읽을수록 역사와 기억의 층위가 조용히 겹쳐지는 시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쌍화리, 이육사의 「광야」 시비 앞이라는 구체적 장소는 이 시의 정서를 단순한 자연의 묘사에서 역사적 사유로 확장시킨다. 시는 계절의 순환과 인간 역사의 부재를 대비시키며, 돌아오는 자연과 돌아오지 않는 인간의 이상 사이의 간극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시의 첫머리는 담담하다.
“더러는 가고 아니 오더라만 / 부지런한 계절은 벌써 다시 왔다.”
여기서 이미 시의 핵심 대비가 놓인다. 사람은 떠나면 돌아오지 않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자연의 시간은 성실하고, 인간의 시간은 단절된다. 이 두 시간의 차이가 시 전체의 정조를 결정한다.
이어 등장하는 구절,
“계모 같은 얼음장 아래에서 자란 / 봄”
은 이 시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다. 보통 봄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는 계절로 그려지지만, 이 시의 봄은 “계모 같은 얼음장” 아래에서 자란 존재다.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처럼, 봄은 냉혹한 세계를 견디며 올라온다. 이 이미지는 단순한 계절 묘사를 넘어, 억압과 시련 속에서도 끝내 피어나는 생명의 의지를 암시한다.
그 봄은 쌍화리 계곡에서 홍매화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얼음이 다 녹지 않은 계곡에서 먼저 피어나는 홍매화는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처럼 보인다. 시인은 그 꽃을 통해 “가고 아니 오는 님”을 부른다. 이는 단순한 연정의 대상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어떤 역사적 존재를 향한 호출이다.
그러나 그 부름은 응답을 얻지 못한다.
“산야에 부르는 소리는 / 멀리 가는 듯 메아리로 돌아오는데.”
이 구절에서 시의 정서는 한층 깊어진다. 부르는 소리는 멀리 퍼지지만 결국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누군가를 부르지만 그 부름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공허한 울림이 된다. 여기서 시는 자연의 장면을 넘어 역사적 침묵의 풍경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조용한 낙차를 만든다.
“백마 타고 떠난 초인은 가고는 아니 오고 / 시비만 / 덩그러니 높다.”
「광야」에서 기다려졌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끝내 오지 않는다. 대신 남아 있는 것은 시비, 즉 기억의 돌뿐이다.
인간의 이상은 사라지고, 그것을 기리는 표식만이 산야 위에 남는다.
이 장면은 추모의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 부재를 바라보는 담담한 인식으로 읽힌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과장된 감정이나 직접적인 찬양에 있지 않다.
시인은 위대한 시인을 기리기보다, 그를 기다리던 시대와 오늘의 시간을 나란히 놓는다.
자연은 매년 돌아오지만, 역사 속에서 기다리던 존재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홍매화는 여전히 붉게 피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장승규님의 댓글
Red Plum Blossoms at Ssanghwari
(Before the stele of Yi Yuk-sa’s “The Wilderness”)/ Sankei Jang
Some depart
and never return—
yet the diligent seasons
never forget to come again.
Spring,
raised beneath a stepmother-like sheet of ice.
Around the valley of Ssanghwari
has fully thawed,
it blooms into red plum blossoms
and cries out for the beloved who left
and never returns.
The voice calling across the hills
seems to travel far,
only to return as an echo—
the transcendent one who rode away on a white horse
has gone
and does not return.
Only the stone stele
stands there,
lonely and tall.
(Written in the study in Johannesburg, 9 March 2026)
*Ssanghwari: a village in Dosan-myeon, Andong, Gyeongbuk, Korea.
임기정님의 댓글
시 읽으면서 저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좀 조금 슬퍼지는 시이네요
시인님 시 잘 읽었습니다
장승규님의 댓글
기정님!
감사합니다.
이번 동인 모임에서 못 뵙네요.
제어창님의 댓글
계모 같은 얼음장 아래에서 자란 봄...
그 봄에 반가운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