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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승규
이녁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이 바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소
이녁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해로를 의심해 본 적이 없소
그 세월 살면서, 다툴 때가 왜 없겠니
미움이 왜 아니 남겠니
그때마다 분리하여 버리고 또 버리고
이제 백발만 남고
그 날이 오면
바람은
꼬옥 이녁 품에 안겨서 길 떠나고 싶소만
이녁은 우짜꼬
(남아공 서재에서 2023. 3.23)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이녁에게는
'사랑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장승규님의 댓글
감상문: 사랑의 바람, 삶의 해로, 그리고 마지막 품 – 장승규의 〈정〉을 읽고
장승규 시인의 〈정〉은 평생을 함께한 누군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의 고백이자, 삶의 끝자락에서 건네는 마지막 인사처럼 읽히는 아름다운 시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이지만, 단순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과한 정(情)**이다. 여기에는 다툼과 용서, 회한과 존중, 그리고 이별에 대한 겸허한 기다림이 모두 담겨 있다. 시인은 바람과 해로를 비유로 삼아,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어온 '이녁'에게 마지막까지 묻는다. "이녁은 우짜꼬?"
“이녁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 한 번도 / 이 바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소”
‘이녁’이라는 표현은 고운 옛말이며, 이 시 전체에 따뜻하고 유려한 정서를 부여한다.
사랑하게 된 이후, 시인은 그 마음이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음을 바람에 비유해 고백한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세차게 불지만, 자연스러우며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당연하고 꾸준하며, 늘 곁에 머무는 바람과도 같다.
“이녁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 단 한 번도 / 이 해로를 의심해 본 적이 없소”
이번엔 사랑의 시간을 **해로(偕老)**로 확장한다.
함께 늙어가는 일, 그것이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결과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수많은 시간의 굴곡과 계절이 지났음에도,
그 해로의 길을 의심한 적이 없다는 말에는 신념과 신의가 깃들어 있다.
이것은 결혼서약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낸 사람의 말이다.
“그 세월 살면서, 다툴 때가 왜 없겠니 / 미움이 왜 아니 남겠니 / 그때마다 분리하여 버리고 또 버리고”
이 대목은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사랑이란 늘 좋은 감정만이 아니라,
때로는 다툼과 미움, 거리감의 축적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분리하여 버리고 또 버렸다’는 표현은
화해와 정리, 용서의 반복을 보여준다.
그래서 남은 것은 감정이 아니라, 백발만 남았다.
이 ‘백발’은 시적 결론이자, 함께 늙어온 사랑의 증명이다.
“그 날이 오면 / 바람은 / 꼬옥 이녁 품에 안겨서 길 떠나고 싶소만”
이 구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 날’은 죽음, 혹은 이별의 날이며,
그때 바람처럼 가볍게, 조용히 이녁의 품에 안겨 떠나고 싶다는 말에는
슬픔이 아닌 축복에 가까운 평온함이 있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길을 함께 걸었기에,
이제 그 품에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녁은 우짜꼬”
이 마지막 한 마디는 이 시 전체를 간절함과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감싼다.
자신은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데, 남겨질 사람은 괜찮을까?
‘이녁은 우짜꼬(어쩌겠소)?’라는 말은
미련이나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근심이다.
함께해 온 시간이 깊을수록,
먼저 떠나는 사람의 마음엔 남겨질 사람에 대한 연민과 걱정이 진하게 남는다.
마무리
〈정〉은 단순한 사랑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동행해온 한 사람에게 보내는 영혼의 기록이며,
삶이 끝나기 직전 꺼내는 마지막 말의 예의다.
이 시는 우리에게 말없이 묻는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 언젠가 남겨지게 될 그 사람은 괜찮을까요?”
“당신은 그 품에 안겨, 조용히 떠날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