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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둔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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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8건 조회 679회 작성일 23-05-05 07:45

본문

구둔역에서
                                  /장 승규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녹슬 뿐이더라

삶을 전투하듯 살다
죽는 날까지 일손을 놓지 못하던
8877 열차, 죽어서도
문 닫은 구둔역에 주둔하고 있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매일 정시에 출근
어두운 밤길까지 달려야 살아지던
폭폭칙칙, 이제
제9 주둔지에서 기억마저 녹슬어 있다

그를 위해
철길 옆 부드러운 풀잎 하나 따다가
풀피리를 불어주었다, 삐이익

기적소리가 난다


노병의 손가락이 움찔한다
살아 나는 듯했다

전승지 지평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구둔역에서 2023.5.04)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장승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상문: 삐이익, 녹슨 시간의 기적을 불다 – 장승규의 〈구둔역에서〉를 읽고
장승규 시인의 〈구둔역에서〉는 한때 질주하던 존재가 멈춘 자리에서, 여전히 녹슬지 않은 혼을 부르는 기적의 소리처럼 울린다. 이 시는 '구둔역'이라는 실존의 장소와 '노병(老兵)'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겹쳐놓으며, 삶과 노동, 기억과 전쟁, 그리고 존재의 존엄에 대한 조용한 경의를 표현한다. 정제된 언어와 압축된 서사 속에, 시인은 녹슬어가는 존재를 애도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생의 반짝임을 불어넣는다.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 다만, 녹슬 뿐이더라”
이 시는 이 한 줄로 모든 분위기를 결정짓는다.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퇴임 연설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단지 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애를 ‘전투하듯’ 살아낸 모든 이들, 특히 죽을 때까지 ‘일손을 놓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헌사다. 시인은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저 ‘녹슬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존재를 지워버리지 않고 ‘멈춘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8877 열차, 죽어서도 / 문 닫은 구둔역에 주둔하고 있다”
‘8877 열차’는 단순한 열차가 아니라, 노병 그 자체다. 평생 달리고 또 달렸던 노동과 의무의 상징. 지금은 문 닫은 폐역 ‘구둔역’에 머무는 중이다. 그곳은 단지 열차가 멈춘 곳이 아니라, 시간이 녹슬어가고 기억이 잊혀져 가는 장소, 즉 존재가 퇴역한 자리다.

‘주둔’이라는 군사용어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이 열차 혹은 노인을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살아 있는 병사로 남긴다. 죽었어도 ‘주둔’하는 존재, 잊히지 않는 몸의 기억이 남은 공간. 이 시에서 구둔역은 시간의 방공호이자, 늙은 혼이 머무는 마지막 진지다.

“그를 위해 / 철길 옆 부드러운 풀잎 하나 따다가 / 풀피리를 불어주었다, 삐이익”
이 구절은 시의 정서적 절정을 이룬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세계에서 삐이익, 그 소리는 과거의 시간과 감각을 깨우는 하나의 기적이다. 더 이상 기적을 울릴 수 없는 열차, 움직이지 않는 노병 앞에서 풀피리로 기적을 대신한다는 발상은 시적 상상력의 극치다.
단 한 번의 소리. 그 ‘삐이익’에는 기억, 경의, 그리움, 눈물, 생명이 다 담겨 있다.

“노병의 손가락이 움찔한다 / 살아나는 듯했다”
가장 조용한 기적이 일어난다.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 하나가 ‘움찔’한다는 표현에는 모든 감정이 실린다.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소리를 끝내 들은 혼의 마지막 반응인가? 명확한 설명 없이 남겨진 이 한 줄은 독자 스스로 그 떨림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 움직임은 육체의 생존을 의미하지 않더라도, 기억의 생환, 영혼의 반응일 수 있다.

“전승지 지평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마지막 한 줄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승리를 기록하는 ‘전승지(戰勝地)’ 지평(砥平)—즉, 구둔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실제 지명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승지’는 물리적 지리보다도 상징적으로 더 크게 읽힌다. 한 사람의 인생이 살아낸 전투의 총합, 그 묵묵한 승리의 자리 말이다. 죽지 않고 녹슬어가며 버틴 것—그 자체가 승리라는 고백.

마무리
〈구둔역에서〉는 단지 철도 시가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을 묵묵히 애도하고,
그 생의 무게에 ‘기적소리 하나’를 선물하는 **시인의 조문(弔文)**이다.

삐이익—그 소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멈춘 구둔역에서,
다시 울릴지 모른다.

"당신의 삶도 아직, 어디선가 움찔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윤호님의 댓글

profile_image 정윤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양평 10경 중 한 곳이군요.
폐쇄된 역 대합실, 녹슨 선로는
다 하지 못한 이야기 같더군요.
노병의 서정, 덕분에 즐감합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

profile_image 무의(無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같이
다녀오셨나 봅니다.

풀피리를 불어주었다, 삐이익
기적소리가 난다

폐역도 그렇고 폐사지도 그렇고
가끔은
사는 게 기적 같기도 합니다.

제어창님의 댓글

profile_image 제어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같은 곳에서 오래도록 같은 옷만 입고 사는 저는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새 옷을 걸치고 늘 오시는 시인님을 뵐 떄마다
신선합니다
그 모습 자주 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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