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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은 시 <먼지의 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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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26-03-17 17:15

본문

지의 꿈 외 4편

 

      이희은

 

 

  카펫이 털린다

 

  우리는 흩어진 자음 모음처럼 날아가 공중을 떠돈다 어서 깃털을 찾아 한 몸을 만들어야 하는데

부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습기를 흠뻑 머금은 후 카펫으로 다시 모여든다 올 사이 어딘가에 숨은 자력磁力 있었나

 

  맨발에 밟히고 엉덩이에 깔리고 가구에 눌려도 살아남는다 태초에 머물던 별자리는 어디였던가 

아득한 그곳 가끔 환영으로 어른거려도 자금은 카펫 속이다

 

  이 카펫을 떠나 날개를 활짝 펴야 하는데 하나로 합쳐질 시간 주어지지 않는다 고슴도치처럼 날 

세운 카펫의 촘촘한 의심은 우리를 눈에 보이지 않게 갈라놓는다

  눈빛 닿지 않는 소파 밑으로 옮겨 앉을 궁리를 한다 날마다 궁리를 한다 궁리에 궁리를 더한다 

카펫 터는 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카펫의 날 눌리는 틈을 타 몸집 늘려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먼지 냄새가 났던가 강력 파워 무선 

청소기가 소음을 내면서 탱크처럼 밀려온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총구처럼 우리를 노린다

 

 

 

기울다

 

 

  밤새 쌓았던 탑을 무너뜨린다

 

  한 코 한 코, 바늘코에 걸어 한 단 한 단 쌓았던 실의 탑, 아침이면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무늬가 자꾸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햇빛 아래에서 다시 시작한다 나무 기둥이 기울어졌고 나무 밑을 지나

가는 이의 어깨도 기울어진다 앉아 있는 벤치도 기울어져 있다 햇살도 기울어진 듯 벽에 걸린 나의 그림

자도 비스듬하다 당신과의 대화도 기울어져 언어의 화살이 빗나간다

 

  지구의 축 기울어졌는데 저기 건물 반듯하다고? 피사의 사탑은 기울어졌기에 많은 이의 눈빛을 모았지 

불안정한 균형이 뜻밖의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지 당신 시선도 어느 쪽으로든 조금씩 기울어지지

 

  기울어진 무늬를 쓰다듬고 피사의 사탑을 쌓듯 가방의 무늬를 쌓는다 기울어짐을 들고 다녔던 걸음 문득

멈추어지면 나의 묘비도 얼마쯤 기울어지겠지

  

 *로베르트 드보라크

 

  

 

갇힌 달

 

 

  창백한 얼굴이 유리창에 낡은 사진처럼 붙어 있습니다

 

  많이 부은 듯합니다

  어떤 징조일까요

 

  당신은 지나가던 구름에게 감싸입니다 눈 감고 옆얼굴만 보여주더니 어느새 구름의 일부가 됩니다

 

  고개 돌리면 멍들까 봐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는데요

 

  기어코 나를 바라보지 않는 당신, 그래도 제자리 지키고 있군요 어떤 죄목으로 구름 깊이 묻힌다 해도 

내가 기다려주길 바란다는 걸 알아요

 

  구름은 흩어지고 멀리서 걸어오던 어둠도 잠시 주춤한 사이, 당신은 아주 잠깐 나를 바라본 것 같습니다 

앉았다 일어서는 찰나 어질, 했으니까요

 

  저녁 햇살이 옥상에 담겨 못물처럼 반짝입니다

 

  마지막 남은 빛을 마신 당신, 그래서일까요 얼굴이 조금 더 둥글게 보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당신은 방충망에서 퍼덕이네요 스스로 물고기가 되어 그물에 걸린 건가요

 

  천천히 잡아당겨 나의 갤러리에 보관하겠습니다 이제 보름이 되어도 당신은 부풀지 않을 겁니다

 

  늑대 인간의 울음소리, 불길한 징조는 사라질까요

 

밤마다 거리엔 가로등 둥근달이 떠오르는데요

 



이 많은 모래는 어디서 온 걸까

 

 

산책로 중간

접시 바닥 같은 모래밭으로

 

까마귀 억센 소리 바람에 부서져 내려온 걸까

 

두리번거리느라 깨진 발자국들 겹친다

 

멀리서 날아온 낙엽도 모래로 변한다

 

우리 함께 어깨 적시며 우산을 잡고 거닐던 그때 빗방울,

방울방울 굳어 모래가 된 걸까

 

영원히 청춘이어야 한다는 약속 알갱이로 남는다

 

시간의 도마 안에서

잘게 다져진 것들

 

산책로, 한 접시 안에 담겨 보이지 않는 그림이 된다

 

흙이 되지 못하고 모래에 머문 생각 자꾸 서걱거린다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는 아무리 밟혀도 부서지지 않고

길게 이어져 저녁으로 간다




 

 여름 일기

 

 

  목백일홍을 보러 왔습니다

 

  떠오르는 해지는 해밤에 묻혀 아직 열리지 않은 해가 다른 몸인 듯한 몸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언제나 뜨거운 정오인 줄 알았는데요

 

  꽃잎의 주름 사이사이

  빗방울과 바람이 숨겨 놓은 이야기

 

  한낮의 분수나른한 물소리에 묻힙니다

 

  나를 끌어당기던 진분홍도 어디 멀리 떠나려는 듯 색이 바랬습니다 손으로 잡으려 하니 바람 

되어 날아갑니다 무덤가에 한 그루 목백일홍인 할머니주름진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꽃빛에 물든 저쪽 세상 환해집니다

 

  해마다 꽃 지고서야 밤낮없이 타오르는 불이었을 거라고 흔적을 찾아다녔었는데요

 

  언제나 어딘가 조금씩 시들어갔던자고 나면 또 몇몇의 꽃잎 피어났던내 청춘의 모습 바람에 

흔들립니다 


  이희은 시집가끔이라도 제라늄』 (시산맥, 2026)

 

 

 

 

본명 이은희

2014년 계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 밤의 수족관』 『가끔이라도 제라늄

디카시집 모자이크

2018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7회 정읍사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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