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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식 시 <파랑주의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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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0회 작성일 26-05-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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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주의보 외 4편


    서영식

 

 

  아버지가 액자를 걸었다 바다는 반듯하게 잘려 있었으나 파도가 높았다 파도는 높은 데서 멈추어 있었다 파도 위에 먼지처럼 노란 달빛이 쌓였다 그건 바다가 아니라 파도나 달의 그림이라 부르는 편이 옳았다

 

  바다를 벽에 걸었을 때 지하 셋방에 처음으로 창이 생겼다 그 후로 내겐 액자를 창이라 부르는 버릇이 생겼다 파도는 창 밖에서 방안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 좋았다 창 밖에는 늘 파랑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으므로 배 한 척 지나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청거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를 때리다가 그만 창을 건드렸다 바다를 막고 있던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굳어있던 파도가 부서져 내렸다 파도에 쌓여있던 달빛도 무너져 내려 방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우리는 파도에 뒤엉켰다 창에서 기러기 떼가 날아들어 끼룩끼룩 울었다 만조였고, 물은 짰다 어머니는 어디론가 쓸려가고 없었고 아버지는 쓰러져 있었다 깨진 유리가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엎어진 우리 위로 바다는 계속 넘어오고 있었다 눈을 뜨면 절정이었다

 

  창에 다시 유리를 끼웠다 바다를 다 쏟아낸 액자에 다시 바다가 차고 달이 차고 파도가 차올라서 평온했으나 언제든 파도는 우리를 삼킬 태세였다 그 후로도 달이 차기도 전에 바다는 자주 범람했고, 파도는 자주 허물어졌다 그 방에 한번도 파랑주의보가 해제된 적이 없었다





홍탁 

 

 

문득 홍어에 탁주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잘 삭힌 그런 안주들은 잘 삭은 술집에서

제법 삭은 내를 풍기는 사람들만 먹는 것 같아서

나같이 설익은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는 데 같아서

미루고 미뤘던 홍탁을, 오늘은

떼를 써서라도 먹고 싶은 것이었다

홍탁이 홍어와 탁주가 붙어 생긴 말이라는 것을

홍어와 탁주를 먹어가면서 흔흔하게 취해가면서

절실하게 배우고 싶은 것이었다

 

잘 삭은 홍어 같은 사람 앞에서

하르르 무너져내려도 좋을 허름한 술집 귀퉁이에서

홍탁은 이래서 삭고, 은 이래서 삭아

홍어와 탁주가 사는 맛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홍어나 삶 같은 말을 홍탁처럼

찰싹 붙여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하루고 이틀이고 취하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조용히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을 때

한 점 잘 삭은 홍어를 입에 넣어주는 사람

그리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입 천정이 다 헐도록 씹지도 않고

홍어나 삶이나 하는 그 시쿰한 몸을

성체聖體처럼 가만가만

녹여먹고만 싶은 것이었다

 


 

 

소통

 

 

둥근 수반 속 금붕어들이

동그랗게 입술을 말아올리고

물 밖으로 내뱉는 소리들을

나는 알아듣고 싶은 것이다

 

수조 속 늙은 고기떼들의

언어를 받아 적어보면 안다

동그란, 동그란, 동그라미 속

물고기들의 낱말들은 수면 위로 떠올라

물 밖에서 바람과 소통한다는 것을

그것은 물 속에서 띄우는

바람의 상형문자라는 것을

 

나도 그런 언어를 갖고 싶은 것이다

물 속에서 물을 비집고 물의 틈을 여는

심해에서 띄워올리는 낱말이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에서

사랑이 되기도 하고 고독이 되기도 하는

아무에게 보이지도 읽히지도 않는

 

저 둥글고 힘센

물고기의 주둥이를 닮은 말 하나를

먼 외계로 띄워올리고 싶은 것이다

 

 


 

호칭

 

 

저기요

너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네 곁에서 나는

--

먼 풍경이 되다가

무관심이 되다가

우주만 한

배경이 되다가, 저기

까마득한 별이 되었다

 

저기, 너는

나를 이렇게 멀리 보내두고

갔다

  



 

유산

 

 

내 어머니가 준 유산은

머리카락이다 곱슬곱슬한

쉰 머리 두 개가 전부다

 

어머니를 닮아 얇디 얇았다

굽고 또 굽었다

 

거머쥔 유산을 날릴까 싶어

그날 나는 손도 못 폈다

그 잘난 유산 챙겨 들었다고

손도 안 흔들었다

 

주먹만 쥐었다

 

서영식 시집 간절한 문장(애지, 2009)

 

 

sys.jpg


1973년 부산 출생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간절한 문장』 

에세이집 툭하면, 인생은』 흔들리는 날에 흔들리는 나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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