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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입술로 / 최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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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79회 작성일 15-09-10 09:51

본문

목마른 입술로

 

최예슬

 

술도 약도 여자도 없는 방에서

가닿을 수 없는 진리에 대해 쓰다가

자꾸만 잠이 들었습니다.

 

달콤한 귓속말로 이어붙인 세계

바느질로 군데군데 비밀을 기워 넣고

태엽을 감아 분노를 적절히 조절하며

부러진 안경다리를 엮어 의자를 만들고

빨강 페인트로 우체통을 정성껏 칠하고

보드라운 솜을 뭉쳐 인형을 완성합니다.

이직 최초의 인류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성난 누군가가 힘차게 소리쳤습니다.

“제발 멍청한 축제를 그만둘 수 없나요”

 

마을 사람들은 재빨리 비밀 속으로 사내의 목소리를 박음질합니다.

 

이곳은 깨어질 수 없는 세계

날마다 비밀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소년은 어린 사과나무에 정성껏 물을 줍니다.

 

꿈에서 깨면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더러운 해변에서

솜사탕을 만들고 커피 심부름을 한다

맨발에는 사탕 종이와 뒤엉킨 해초들이 감기고…

남은 원두 찌꺼기로 쓰디쓴 커피를 내려 마시며

다음에 도착할 마을을 상상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잠들기를 두려워하며

살아 있음을 유예하는 걸까

 

울며 울며 일곱 개의 층계를 오르던* 소년은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달콤한 사과 파이를 베어 물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창고

“지금 여기 쌓여 있는 물건들 중에서 ‘침대’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네 것으로 삼아도 좋아”

 

너는 창고를 활짝 열어주었는데

 

그곳에는

썩은 나뭇가지만 잔뜩 쌓여 있었다.

 

* 박인환 「일곱 개의 층계」

 


 

choiyesool-140.jpg

 

198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과 졸업

2011문학동네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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