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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위한 변명 외 2편 / 윤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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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62회 작성일 25-04-0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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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시산맥창작기금 선정작

발을 위한 변명 외 2편

윤석호


그곳에 가면 신발은 신발장에 꼭 넣으세요 개가 물고 갑니다 숙소를 나서면 사방이 사막이고 막막해진 개들이 어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발 냄새로 환각에 빠졌는지 알 수 없어요 외지인의 등 굽은 신발을 보면 환장을 합니다 아마 신발도 동조했을 겁니다 물어뜯기고 뒤집히고도 싶겠죠

한번은 고깃집에서 반쯤 취해 남의 신발을 신고 나온 적이 있었어요 아무리 걸어도 집으로 향해지지 않더군요 어찌나 신발이 발을 밀어내든지 구겨 신은 채 질질 끌고 밤거리를 헤매다녔죠 발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돌아갔을 땐 이미 가게 불은 꺼졌고 한동안은 그 신발에 맞춰 살아야 했거든요

아버지는 구두를 잘 버리지 못해요 신발장을 열면 발자국이 그리워 입 쩍 벌린, 낡은 구두들의 허기진 침묵을 보게 됩니다 짝이 없는 것들을 골라 버렸는데 아버지가 다시 주워 왔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 이야기를 안 하는 것처럼 나도 구두 이야기는 절대 안 꺼냅니다

웬만하면 신발은 발을 받아들여요 발자국을 한 장씩 벗겨내며 얇아지겠지요 힘든 발자국일수록 앞부분만 찍히는데 정작 뒷굽이 먼저 닳아요 뒷모습처럼요

아이 속 아이*

생각해 보면,

애들 싸움이었는데 왜 그리 섬찟했을까

실종보단 잠적으로 기억하면 좋겠어

요즘, 자주 너를 느껴

필요할 때만 눈에 띄는 숨은 그림 같아

아픔 하나 지나면 아이 하나 버리고

넌 또 변장하고 다음 정거장에서 승차하지

운전사가 나였던가?

구분이 잘 안 가

뚜껑을 열고 덮인 천을 젖히면

여든여덟 개 가지런히, 사라졌던 아이들

감정은 악보에 맡겨, 너흰 소리 지를 준비하는 거야

화장을 지우다 말고

너도, 모자이크라는 걸 알잖아

낱낱의 모서리가 비명처럼 살아있는

떨어진 조각을 다시 붙여 넣고 있어

액자 속 사진이 분열하는 밤

관객과 눈 맞추지 말라 했잖아 눈치챈다니까

상대가 하나면 나도 여럿일 필요까진 없어

눈을 감으면 안에서 눈을 뜨게 돼

내일은 누가, 내가 될지 모르지

*fetus-in-fetu 혹은 베니싱 트윈(Vanishing twin)에서 가져옴

이렇게 붉은 꽃을

“땅을 비집고 나올 때부터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저는 왜 땅에서 태어났나요”

“엄마의 엄마 그 먼 처음의 엄마는 땅이었단다”

“가지를 뻗고 잎을 냈지만 꽃 피울 줄은 몰랐어요”

“언제나 꽃은 생각보다 빠르단다”

“색깔을 정하지도 못했는걸요”

“하지만 예쁜 꽃을 피워 냈잖니 이렇게 붉은 꽃을”

“붉은 꿈밖에는 꾼 적이 없거든요”

“그건 엄마 꿈이란다 엄마는 노을처럼 아름다웠지”

“엄마 꿈도 붉었나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엄마는 핏빛 같은 사랑을 했단다”

“많이 아팠나요 엄마는”

“혼자 고개를 숙이고 점점 검붉게 변해 갔지”

“아무도 없었나요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꽃을 사랑하지만, 꽃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단다 자신 말고는”

“그럼 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건가요”

“세상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꽃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단다 자신조차도 그런 꽃은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불을 끄게 되지”

“사랑도 할 수 없는데 나는 어떤 색깔을 꽃씨 안에 숨기게 될까요”

“사랑이란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지 바람에 흔들리고 나면 사랑을 알게 되지”

“바람 부는 밤이면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바람 때문에 꾸지 못한 꿈들이 꽃잎 속에 쌓이면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진단다”

“왜 모든 것은 나랑 상관없이 정해지나요”

“엄마도 네가 붉은 꽃을 피울지 몰랐을 거야 이렇게 붉은 꽃을”

■ 선정 소감

시한부의 반쪽 생명들이 돌진합니다.

살아남고 싶은 간절함으로 몸을 휘젓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잉태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개별성과 숭고함을 믿습니다. 그러나, 함께 질주하던 수많은 불완전체들의 열망이 숨은 그림처럼, 갓 태어난 영혼 안에 잠재해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때로 중독적이고 기만적이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지켜낸, 자신 속의 또 다른 자신.

그것을 끄집어내려는 고집이 오래되면 결국 글이 편협해지고 일방적이게 되고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동안 시집 출간을 망설였습니다.

귀한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윤석호 약력


  

201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마을 동인

시집 『4인칭에 관하여』(2020, 시산맥)

미국 메릴랜드 거주

제5회 시산맥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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