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에서 자라는 나무 / 최금진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고 아홉시 뉴스 데스크로 뛰어나와 외치던 사람이 전국에 생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이 춤을 추는 동안에는 자신을 인식할 수 없듯이, 환각과 망상 속에 사로잡힌 자신을 그는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일그러진 돋보기로 들여다본 사실은 순식간에 확신으로 바뀌었을 테고, 확신은 걷잡을 수 없는 진실로 치닫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망상 속에 한 발 딛고 서성였던 적이 있었으리라. 망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타인과의 부조화와 대립의 틈에서 유령처럼 빠져나와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리고 상처를 견딜 수 없는 약한 자들은 아주 쉽게 그 길의 어둡고 좁은 낭하를 걸어갈 수 있다. 절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몸과 정신은 축축 늘어진다. 그 피곤하고 느직느직한 몸으로 환각 속에 들어가 누운 채 밖을 바라보면, 누군가 떠나고 있고, 뒷거래를 하고 있고, 험담을 하고 있고,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실이 ‘진실’인 것이 두려워지는 망상의 순간에 환각은 정신을 숙주로 삼는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석 달 동안은 계속 날 찾아왔었다, 는 어머니의 말씀은 아프다. 아무리 떠나보내려 해도 한번 근이 박힌 어두운 그림자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나 또한 아직도 첫사랑 소녀 애를 한 달에 한두 번 꿈에 본다. 아무리 오랜 시간 애도를 해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의식의 저 아래에서 여전히 캄캄한 잠에 눌려 있다가 내가 잠들면 깨어나는 것이다.
주머니칼을 들고 나무에 올라 애인의 이름을 새겼다 분노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몸에 털이 되어 돋았다 구름이 벗은 몸으로 창가에 와서 떠나지 않고 칠 년을 더 살았다 나무가 세포분열하여 나에게 어린 애인을 낳아주었지만 아버지는 사생아를 부끄러워했다 쟤가 걔야? 맞아, 쟤가 그 애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꺼내어 먹을 추억이 없을 때 제겐 아주 오래 씹어 먹을 수 있는 죄책감이 있어요, 나는 길게 자라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울었다 아버지가 나 대신 나무에 성기를 예쁘게 달아주었다 나무가 삐딱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복날에 검둥개가 매달렸고, 돌에 맞아 죽은 뱀이 걸렸고 그만 자신을 위해 자비를 베풀라고 밤마다 나무가 등 다독였지만 나는 나무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서웠다 애인이 먹구름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깔깔 웃어댔다 행인들은 귀를 틀어막고 빠른 걸음으로 귀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재앙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주머니칼로 새겨진 애인의 형상이 차츰 나무에서 내려와 어느 날은 우리 집 안방에 앉아 아버지 노릇을 했다 미친 놈, 미친 놈, 나무가 나를 계몽하는 소릴 들었지만 그건 언제나 내 목소리와 똑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다 쟤가 걔야? 어머나, 어쩐지, 어쩐지...... 그렇게 세상이 잔뜩 기울어져 갔다
- 최금진,「편견에 빠진 나무의 성장 과정」전문, (『현대시』 2009년 1월호)
오지도 않은 전화를 들고 다니며, 왜 자꾸 내 전화를 끊는 거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할머니와 나는 수없이 싸웠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망상과 환각의 날들은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았던 그 나무는 이제 늙고 병들어서 어떤 새들도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영원히 꿈을 꾼다. 사실이 ‘사실’인 것을 모르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비뚤어지고 일그러져 보이는 돋보기안경으로 그 꿈을 읽을 때, 거기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 있으면 좋겠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아도 좋다. 꿈을 현실로부터 굳이 분리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나 또한 일생 소풍을 나온 듯 행복한 꿈길을 걷다가 가고 싶다. “나는 나무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