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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지 않는 바람개비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수퍼스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9건 조회 315회 작성일 26-03-11 15:41

본문

손끝에서 물비린내가 태어난다

물은 아직 흐르기 전인데도 먼저 기억이 젖는다

 

계곡 아래에서는

어젯밤의 물고기가 내일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앞으로 흐르는 돌들이 뒤로 미끄러진다

돌의 어깨가 너무 반들거려

내가 만져보기도 전에

물의 손바닥에 오래된 못자국이 생긴다

 

누가 시계를 물속에 빠뜨렸는지

시간은 젖은 톱니처럼 어긋나 돌아가고

잘못 끼워진 아침이

저녁의 그림자를 짧게 만든다

 

기형의 시대가 앞으로 걸어갈 때

물고기들은 과거의 지느러미를 현재에 세우고

아직 오지 않은 패배를 거부한다

하얗게 가라앉는 뼈들이

흐름의 발목을 잡아 흔들면

피는 쇠 냄새를 배우기도 전에 먼저 환한 색을 잃어버린다

 

침묵은 말보다 먼저 부서지고

꿈은 상처보다 늦게 태어난다

적당한 타협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굴욕만 먼저 도착해

새벽안개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바람은 불고 불은 바람을 기억하지만

바람개비는 회전을 잃어버린 채

제 그림자만 돌리고 있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거센 물살의 높낮이를 바꾸기 위해

시간의 역류를 손목처럼 칭칭 감고

돌지 않는 바람개비의 심장을 조용히 다시 맞추러 온다

 

잠들지 못하는 물의 집 안에서

오늘과 어제가 나를 동시에 부른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못한 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픔을 먼저 느낀다.

댓글목록

힐링링님의 댓글

profile_image 힐링링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람개비는 회전을 잃어버린 채
제 그림자만 돌리고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상실감의 그림자를  찾아내어
소리 없는 외침이 강렬함을 더해 줍니다

정체 된 시대의 뒤안길을  직시해 보는
시선이야말로  우리를 다시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인님의 어법의 깊은 통찰력을 더해
우리 생의 방향성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게 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는 아픔을 먼저 느낀다

이 시의 백미는 이 마지막 연에  있습니다
아직 도착도 하지 않는 아픔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우리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게 합니다.

깊은 산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퍼스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힐링 시인님, 제 시 보다 저의 시 세계를 분석한 힐링시인님의 시평이 훨씬 더 빛이 납니다.
창작방에서 아니 시마을 전체에서 시인님처럼 예리하기 분석하시는 분이 또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멈춰버린 바람개비처럼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시간과 질서를 회복하려는 저만의 의지를 희미하기 드려내려 했는데 많이 부족하네요.
좋은 오후시간 보내십시오. 힐링시인님.

고나plm님의 댓글

profile_image 고나pl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상상력이 풍부한 시에 늘 감탄합니다
자분하게 풀어가는 힘이 느껴지구요
늦음 밤 시인님의 시에 젖었다 갑니다
편히 주무시구요~^^

미소님의 댓글

profile_image 미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체된 현재에서 오는
부정적인 미래를 읽었네요. 수퍼스톰 시인님!
저도 나이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시절을 겪고 있네요
생각해보면 각 나이대가 주는 불안은 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말고 오늘을 잘 살면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을 다독이고 가네요
좋은 날 되십시오

이장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이장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마지막 연이 인상 깊네요.
상상력 하나는 으뜸입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profile_image 수퍼스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소시인님, 이장희 시인님,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제 동생 수녀의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오느라 이제서 글을 드리네요.
부족한 글에 마음을 얹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분 시인님 늘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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