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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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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허영숙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543회 작성일 22-11-02 14:02

본문

(사진:모나리자정)


과월호

 

갓 사춘기를 맞은 소녀의 살갖처럼

콩기름으로 오래 문질러놓은 마루처럼

곁표지가 반들반들한 새 잡지를 내밀며

미장원 주인이 잠시만 기다리란다

새것답게

막 말 트기 시작한 사이처럼 한 장 넘기기가 만만치 않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침엽의 냄새

페이지가 칼날처럼 도도해서

손가락이 아슬하다

여러 사내들이 침 발라 넘겨 본

선술집의 늙은 여자처럼 오래된 과월호

많은 사람들의 지문을 읽어 귀퉁이가 불룩하다

젖은 생을 넘겨온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듯

한 장 한 장 잘 넘어간다

누군가의 지문 위에 나의 지문을 맞댄다

젖지 않고 넘어가는 페이지는 없다는 듯

하늘이 가을을 넘기려고 비를 묻힌다

댓글목록

제어창님의 댓글

profile_image 제어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가을도 페이지를 넘기고 과월호가 되어 가고 있군요
아쉽고 안타깝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페이지도 있지만 하늘은
또 제 갈 길을 가는군요~

산저기님의 댓글

profile_image 산저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과월호 좋네요 참 좋네요
그런데 요즘 과월호라도 볼라치면
침침한 눈 때문에
들었다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
허시인님의 과월호는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민기시인님의 댓글

profile_image 정민기시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운 시심에
낙엽처럼 마음 놓고 갑니다.

즐겁고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여행자


 정민기



 강제 노동하고 온 사람처럼 그의 발은 부르트고
 가뭄처럼 메말라 있다 잔뜩 배가 부른 배낭은
 묶인 목줄 같은 두 팔을 빼고 편안하게 나자빠져 있다
 저녁도 거르고 싶어질 정도로 걸어온 그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뒤적거리다 이내
 찾아낸 물병자리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켠다
 다음 날이 되어 다시 걸으려는 그의 머리 위 하늘이
 짓궂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짙은 먹구름을 만들고 있다
 이윽고
 먹구름의 소매 끝을 벗어난 가련한 눈물이 그의 갈 길을
 구슬픈 소리로 적셔나간다
 하늘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사나운 짐승들이
 우르르 쾅쾅 울부짖느라 야단이다
 그는 비가 그치기까지 펜션에서 머물다 가려고
 다시 배낭을 목줄 같은 두 팔에서 스르르 풀어낸다
 별이 보이지 않아 자장가도 없고
 빗소리만이 두 귀를 깨워 말똥말똥 듣고 있다
 핏줄 같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그도 나처럼 Rh+ O형인 혈액이 한창 흘러가고
 사치스러운 입담은 티끌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창문으로 바라보는 앞산은 병풍처럼 안개가 드리워진다
 비 오는 날이라서
 저 푸른 도서관도 오늘은 발길이 뜸해 대출률이 떨어진다
 그는 생각하는 동상처럼 쪼그리고 앉아
 디저트로 달콤한 생각을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창밖에는 바람이 먹구름을 쓸어내느라 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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