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물질 / 이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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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물질
이다희
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친다
밤이라서 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밤을 관찰할 수 있는 밤을 가질 수 있다면
어두운 깃털들이 살랑 흔들리며 사방에서 다가온다
나에게는 마땅히 나에게만 쏟아지는 핀조명이 있기 마련이다
번개가 칠 때 잠깐 밤이 일어난다
밤의 깃털들이 내 코를 간지럽혀 자꾸 재채기가 나온다
수프를 저을 때 죽죽 그어지는 여러 선들을 수프가 그대로
삼키는 것을 보며
달콤하다는 것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꽃이 녹는다
어떤 게으름을 천성으로 여기던 계절에
수천 개의 검은 쌍안경을 한 번에 들 수 있다면
밤의 꽃과 꽃의 밤을 구별하다가
꽃의 밤과 밤의 꽃의 회오리에 기진맥진해
쌍안경은커녕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오던 날에
어두운 깃털 주워
어둠에 대고 알 수 없는 몇 가지 다짐을 쓴다
―계간 《시산맥》 2025년 봄호

1990년 대전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시창작 스터디』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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