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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여 가라 / 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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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33회 작성일 25-05-27 17:11

본문


기분이여 가라

 

      김 

 

 

 어제는 비가 왔다. 햇빛에 물이 마르고 있다. 몸도 말릴 수 있을 것 같은 햇빛이다

그래 몸이 마르고 있다. 비도 마르고 있고 빛도 마르면서 당도하고 있다. 어제는 비가

왔다. 오늘은 햇빛에 물이 마르고 있다. 웅덩이는 안 보인다. 웅덩이에 비친 거리의

풍경도 안 보인다. 당연히 거리를 떠돌다 잠깐 멈춘 내 얼굴도 안 보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다. 거기서는 빛도 마르고 있다. 체구도 작은 사람이 왜 저렇게

말랐을까 싶게 걸어간다. 검은 상의에 검은 하의를 입고. 흰 상의에 흰 하의를 입었다고

달라졌을까. 저 거리의 기분. 거리를 걷는 기분. 눈앞의 기분. 눈 뒤의 기분.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는 기분이 달아나고 있다. 일어나고 있다. 기분은 일어나는 것이고 달아나는

것이고 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 이렇게도 오래 붙들려서 불쾌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다.

기분은 휩싸인다. 기분이 기분을 둘러싸고 있다.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이라고 하자 기분은

달라진다. 기분은 어찌할 수 없다. 기분은 어쩌자고 기분이 되었는가. 이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힘닿는 데까지 가자. 끝날 때까지 가자. 기분은 가야 한다. 기분은 끝나고 

있다. 이미 시작도 안 했는데. 기분이 온다. 기분을 기다리고 있다. 기분이 간다. 기분을 

보내고 있다. 기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다시 온다. 기분이여 가라. 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 

기분을 기다리고 있다.

 

김언 시집, 백지에게(민음사, 2024)




20090921000045_0.jpg


1973년 부산 출생

부산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8년 《시와 사상》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거인』 『모두가 움직인다』 
 백지에게』 
2006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제9회 미당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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