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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촉 당신 / 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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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37회 작성일 22-12-26 09:46

본문

불가촉 당신

 

​   고경숙

 

 

  내가 일몰을 바라볼 때 지구 반대편의 새벽도 어둡고 고요했을 겁니다 서역의 바람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분분히 일어서던 그때, 우리 마주치지 못했던 눈동자 속에서 가지런히 눈물이 떨어집니다 당신이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잉여의 노래입니다

 

  계절이 예정된 대로 거침없이 깊어집니다 시간 속에서 당신을 걷어낸 나는 지워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허락받은 허름한 저녁을 지나는 기차의 헛발질 소리, 그리고 잠깐 부딪쳤을 등의 체온 정도를 기억하는 일 모두 꿈이어야 합니다. 갠지즈강을 걸어나온 물빛 영혼을, 다 탄 장작더미에서 살아남은 그대의 얼굴을 내가 감싸쥐었을 때 그대의 두 손이 나를 일으켰을 때, 그 순간이, 우리가 유일하게 스쳐지나는 교차점이었음을 어둠이 내리고 칠흑같은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더듬더듬 만지며 깨달았습니다 유기와 궁핍으로 굶주린 떠돌이개와 고양이들조차 내 발을 핥기를 주저합니다 앙상한 검은 발바닥에 별처럼 하얗게 붙어있는 모래를 털어주던 당신은 어느 별에서 보낸 어머니의 선물이었을까요? 꿈은 늘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고 나는 쫓깁니다

 

  나는 당신을 만지지 못하고 당신 또한 그러하다면 더 이상 태양의 제단에 불을 지피는 일 따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죽어 문들어질 만큼만 손끝을 내리찍어 다시는 병든 의지가 당신에게 가닿는 일 없어야 한다고 율법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만지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겨울입니다

 

고경숙 시집, 유령이 사랑한 저녁(현대시학, 2016)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등단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달의 뒷편』 『혈穴을 짚다』『유렁이 사랑한 저녁』

 허풍쟁이의 하품』 등 

1999년 제 4회 하나.네띠앙 인터넷 문학상 대상  
2000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2012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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