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모퉁이가 있는 길 / 김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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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모퉁이가 있는 길
김경윤
오늘도 해를 등에 지고
여덟 개의 모퉁이를 돌아 만물 슈퍼에 술 사러 간다
퉁명스러워도 정 깊은 슈퍼아저씨 얼굴에 노을이 물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길이지만 길모퉁이 돌 때마다
마음이 먼저 울퉁불퉁 요동치는 그 길
어느 봄날엔 겅중겅중 길 위로 뛰어드는 고라니를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로드킬 당한 길고양이를 보내기도 했지만
구불거리는 모퉁이마다 팡팡 팝콘처럼 벚꽃이 터지는 날엔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꽃비에 젖어 마음이 다 환해지는 그 길
여름에서 가을까지 모퉁이마다 붉은 배롱꽃 피고 지면
백일몽 같은 몽롱한 해무海霧 속에서 지척의 백일도가 가물거리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엉금엉금 게걸음으로 고갯길을 넘지만
밤길 오다 보면 어느 모퉁이엔 가로등 가족처럼 반기는 그 길
돌아보면 내 살아온 생애도 수많은 모퉁이를 돌고 돌아
이제 한 모퉁이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부처는 여덟 개의 바른 길을 가라고 했지만
나는 모퉁이 많은 이 길이 사람의 길만 같아
매번 같은 날이지만 날마다 내일이 궁금해지듯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음이 그저 통통거린다
나는 오늘도 여덟 개의 모퉁이를 돌아
만물 슈퍼에 술 사러 간다
―계간 《사이펀》 2021년 가을호
1957년 전남 해남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졸업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으로 작품활동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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