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탕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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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탕
김상미
연포탕과 비슷한 문어탕을 먹는다
문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중 생물
무수한 빨판이 박힌 여덟 개의 통통한 다리와 둥근 몸통 하나
문어 그림으로 미술상을 받은 적 있듯이
문어는 너무나 단순해서 그리기도 쉽다
다른 아이들은 징그럽다고 잘 그리지 않는 문어를
나는 새보다도 고양이보다도 더 잘 그린다
언젠가 바위틈에 꽉 붙어 있는 어린 문어를 잡은 적이 있다
그 축축하고 놀라운 빨판의 힘에 놀라
다시 바다 속으로 풍덩 던져버렸지만
그때의 그 촉감, 그 흡착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게 안간힘이라는 걸까?
처음엔 나도 외계인 같은 문어가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 번 살려준 것들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법
그 이후로 나는 문어가 좋아졌다
제사상에 오른 마른 문어는 언제나 내 몫이듯
문어는 오징어보다 낙지보다 주꾸미보다 훨씬 더 식감이 두툼하고 맛있다
그런 문어를 왜 구약성서 레위기에선 부정한 짐승이라 하고
북유럽 쪽 사람들은 악마의 물고기라고 했을까?
단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싸잡아 폄하해도 되나?
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어도 그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문어, 오징어, 뱀장어, 가오리, 해삼, 멍게, 개불, 굴 등등
싱싱한 바다 냄새 나는 것이라면 무조건 다 좋다
그중 문어가 더 정이 가고 좋은 건
문어는 아주 짧게 산다는 것
그리고 평생 한 문어와 딱 한 번 격렬하게 짝짓기 한 후
새끼들을 보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가족 개념이 없다는 것
머리가 아주 좋고 피부가 색소체로 되어 있어
움직일 때마다 색색의 불꽃놀이를 펼쳐 보여준다는 것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처럼 맹랑하게 생겼음에도
물속에서 몸을 쭉 펴고 있을 땐
마치 춤추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것
그보다 더 좋은 건 줄행랑을 칠 때마다 내뿜는 새카만 먹물!
언젠가는 그 먹물들을 모아 잉크로 사용하면
틀림없이 새카만 밤, 새카만 구름이라는 멋진 시가 탄생할거야
그런 꿈같은 망상에 해롱해롱 젖으며
연포탕을 닮은 문어탕을 먹는다
잔인할 정도로 쫄깃쫄깃 맛나게 꼭꼭 씹어 삼킨다
- 계간《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 『잡히지 않는 나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
2003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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