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 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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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조하혜
눈이 어두운 두더지를 사랑한다, 두더지라는 조금 징그런 이름을 사랑한다
허허로운 겨울 산책길에서 만난 철모르는 개나리꽃을 사랑한다
철모르고 불쑥 피었다가 시들 새도 없이 죽은 것들을 사랑한다
새끼를 사산한 후 심드렁한 슈퍼집 개 누렁이를, 누렁이의 흰창눈을 사랑한다
매서운 바람부는 어느 추운 날, 꼭-다문 여자의 입술을 사랑한다
한없이 떠는 것들 속에서 떨면서 떨지 않는 그 입술을 사랑한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음을 훔치는 사기꾼을 사랑한다
뻔한 거짓말로 마음을 훔치는 기술을, 그 호주머니 안으로 밀려오기까지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여자의 마음들을 사랑한다
시골 장터에서 만난 곰보 여자의 얽은 얼굴을 사랑한다
살성보다 더 늘어진 그녀의 웃음을, 팔자보다 더 늘어진 그 웃음의 주름을 사랑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의 전선에서 불려졌다가 지금은 찬송곡이 된 노래를 사랑한다,
가사가 바뀌어도 곡조가 남아 '영광'을 찬양하는 이 치욕을 사랑한다
미워하고 미워하기에도 때로 너무 미운 것들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사랑하기에도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에,
사랑해선 안 될 것들을 사랑한다
- 조하혜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 (천년의 시작, 2003)

1994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 『울지말아요 비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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