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다, 읽다 / 손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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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다, 읽다
손진은
에어프라이어에서 고구마가 퍽퍽, 터지며 익는다
삼동을 철원 대마리, 움막에서 몸 포개다
춘삼월 햇살 따라
예까지 내려온 우묵하고 길쭉한 놈들 달구어지기 시작할 때
고소한 냄새와 어깨동무한 썩은 내가 집안을 건너간다
아침부터 웬 고약한 냄새람?
늦잠 깬 아내 잔소리에도
뜨거워진 몸 찢기며 익어가는
놈들은 대마리 하늘 잉잉대는 벌떼도, 삭은 뼛조각의 혼도, 지뢰꽃도
묵묵 빨아들이며 몸 불렸다고,
울퉁불퉁한 농부 음성이 수화기 너머 건너왔다
알고 보니 놈들의 몸뚱인 썩어 있었던 것
썩어가면서도 검은 죽음은 안쪽 보얀 삶에 보호막을 쳤던 것
아, 죽음이 삶을 안고 간다는 걸 일깨우기라도 하듯
몸을 달구고 있었던 것
내일부턴 썩은 부분
도려내고 익히라구, 여보!
저들 비애(悲哀) 근처에도 못 가본 아내의 핀잔에도
고소한 냄새와 어깨동무한 썩은 내가
막무가내 실내를 점거한 채
익어가면서 아내와 나를 읽는다
달큰한 향기가 코를 들썩이게 한다는 말 따윈
아랑곳 않고, 우묵한 눈 홀쭉한 볼을 가진 놈들이
기단부 같은 죽음 위에 층층이 놓인 게
삶이란 걸 읽히며 익는다
무슨 속죄양처럼, 더러는 다리가 날아가고 찢기고 터지면서
—계간 《청색종이》 2022년 여름호

경북 안강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5년 매일신문 시평론에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숲에 풀어놓고』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저서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
『현대시의 지평과 맥락』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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