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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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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95회 작성일 16-11-14 08:59

본문

 

백지 

 

 고 영

 

 

 당신을 초기화 시키고 싶었네.

 

  우리가 세계와 만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 나를 만나 가벼워지기

이전의 침묵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네.

 

  당신은 보이지 않는 강박

  보이지 않는 공포

  영혼으로나 만날 수 있는 미래, 라고 했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아아, 당신이 옳았네.

 

  문장 몇 개로 이을 수 있는 세계는 없었네. 오지 않는 답신은 불길한 예감만 낳을 뿐

  내 흉측한 손은

  보이지 않는 행간을 떠돌고 있었네.

 

  고양이는 고양이의 방식대로 구르고

  자갈은 자갈의 방식대로 구르고

  펜은 펜의 방식대로 구르고

 

  그러나 모두 근엄한 얼굴이었네.

 

  가득 들어차서 오히려 불편한 자세로부터

  당신의 미소를 꺼내 주고 싶었네.

  너무 깨끗해서 두려운

  당신의 그 두근거리는 심장을 돌려 주고 싶었네.

 

  지금 내 머릿속에 오직 당신이라는 프로그램만 실행 중이네.

  다른 창은 띄우고 싶지 않네.
 

 


goy.jpg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3년 《현대시》신인상 등단
2004, 2008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받음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딸꾹질의 사이학』
현재 《시인동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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