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 박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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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박정대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참으로 멀리 갔던 마음이 고요히 돌아오는 시간이면 우주는 혀끝에서
침묵으로 맴돌고 내가 말을 하면 우주에 굉음이 일어날 텐데 또 몇 개
의 별들이 폭발할 텐데 나의 침묵이 우주의 고요를 돕는 시간이면 갯벌
에는 망둥어가 뛰고 황새치는 먼 바다의 고향으로 나아가고 마음은 다
해진 짚신처럼 절뚝이며 내게 돌아오느니
우리른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오전 열한 시의 나무 아래서 나는 한밤중의 시를 쓴다 내가 할 수 있
는 일은 펜을 움직여 우주의 운행을 돕는 일 그러나 지금은 인류를 향
해 경고 같은 마지막 숨결의 시를 쓴다 마치 알래스카에서 자신이 관찰
하던 곰에 죽임을 당한 어느 비운의 사내처럼 알래스카의 바람처럼 어
느 날 문득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니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무엇엔가 사로잡힌 영혼들이 절뚝이며 걸어가는 밤 그 밤을 고요히
덮어주려고 남반구의 구월에 올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는데 오전 열한
시의 사막에서 누군가 방금 눈을 떠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자정(子正)
의 모래사막을 응시한다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단편들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등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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