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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뚜껑 / 이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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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085회 작성일 16-04-25 12:43

본문

 

펜 뚜껑

 

  이현승

 

가방을 잃어버렸다.

펜은 없고 펜 뚜껑만 남아서 내버렸는데

가방에서 펜이 나와 뚜껑을 찾으러 간 사이였다.

가방에 든 신용카드와 여권과 함께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펜 없는 펜 뚜껑처럼, 펜 뚜껑 없는 펜처럼

 

없어서 더 분명해지는 존재가 있다.

잃어버린 가방과 집시의 희미한 미소.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왔냐와 무얼 하러 왔냐가

공연한 의심과 문책이 되는 순간들

 

증명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필사적으로 내가 되어야 하다니 불공평하다.

놀러 왔는데 테러하러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조그만 아시안은 그만 불친절해지고 싶은데

경직된 미소는 난처한 의심만 만들어낸다.

 

뚜껑만 남은 펜처럼 없어서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어서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나는 펜을 줄 테니 가방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

테러범 같은 집시를 만나야 하고

여행은 반드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고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전남일보>신춘문예 당선
2002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 수상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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