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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 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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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608회 작성일 16-04-07 11:14

본문

 

 인장 


  이용임

 

 

   우산을 쓰고 처마 아래 선

   남자


   무엇을 기다리나요 비가 그치길 기다려요 슬픔이 멎길 기다려요 당신의 밑둥을 베면 먼지만 쏟아져 나오겠군요 빗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려요 우산이 가벼워지길 기다려요 가뭄이에요 시든 꽃들도 사라졌어요 발을 뗄 수가 없어요 구두를 새로 닦았거든요 입술이 갈라졌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소나기가 내려요 그녀의 이름을 놓칠까봐 이가 으스러져요 그을린 나뭇가지에 잎사귀 대신 새의 심장이 말라가요 일사에 걸린 사람들이 꺼멓게 줄어들고 있어요 비가 내리지만 시야는 밝군요 골목 끝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잔꽃무늬 원피스가 생생해요 마지막 울음소리도 멈췄어요 빗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아요 손톱을 세운 소리가 흉골을 쥐어뜯으며 폐에 차올라요 이봐요 대체 누구를 기다리나요

 
   방금 사랑에서 해고된

   남자

   진부한 문장으로 정리된

   남자

   읽지 않은 우편함 속 고지서

   마이너스로 증가하는

   남자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보는

   남자

   마른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두를 닦고 우산을 쓰고 처마 아래로 출근하는

   남자

   속눈썹이 창백한

   남자

   발톱 대신 뿌리가 자라는

   남자

   우산 아래 처마 아래

   겹겹 그늘로 환한

   남자

 
   아직도 붉어지는

   당신의 육체가 지겨워

 


   우산을 펼치고 담장으로 처마로 여자의 겨드랑이 냄새가 나는 오후로

 
   유류품으로 먹구름과 소나기가 있군요 서명해 주세요 안심하세요 금방 증발했답니다 우기를 수집하던 가시들도 모두 제거했어요 산자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하지요 투명하고 맑은 것들은 모두 위험해요 비를 믿는 병이라니

 
   젖으면 썩는 거야

   당신의 뼈처럼

 


   여자는 걷는다 우산을 펼치고 살만 남은 우산을 펼치고 건강하게 그을린 이마를 들고 담장을 지나 처마를 지나 시든 꽃들과 불타는 나무를 지나 멀고 아른거리는 골목으로 금빛 손톱이 움켜쥔 그늘을 건너 오래 비가 그치길 기다려요 슬픔이 멎길

 


common11.jpg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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