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 백상웅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백상웅
가끔 있다,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삶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저녁이.
마흔이며 쉰 너머의 한계가 보이는
늙은 호박 같은 저녁이.
퇴근길에 고향 친구랑 한 십 년 만에 통화하다가,
스물 넘고서부터 패배한 날들을 알린다.
둘 다 부족해서 여자에게 한두 번씩은 차였다.
너는 공무원 시험, 나는 신춘문예에
수 해 죽만 쑤다가
다 때려치우고 가끔 마른 넝쿨처럼 울었다.
취업하고 첫 월급 받아보니 그 끝이 아찔하니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미처 따지 못하고 늙어버린 저녁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절 바뀌어 폭설에 파묻힌
얼어붙은 저녁이 와도,
내가 무능해서, 인생 내가 잘못 살았다고
자책하는 날이 왔다.
네 아버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늙어갔을 텐데, 하며
수긍하는 저녁이 굴러왔다.
아비들의 그런 텅 비고 주름진 저녁에 바람은 좀 불었을까,
늙은 호박을 부러 밟은 적 있다.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2008년 『 창비』신인상 수상
시집 『거인을 보았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