滴 / 김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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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66회 작성일 17-08-29 11:09본문
滴
―멸실환처럼
김신용
1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고 난 뒤, 다음 빗방울이 매달린다. 지금 떨어진 빗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도 의구심도 없이, 빗방울이 매달려 반짝인다. 떨어질 때를 기다리며 눈을 빛낸다. 먼저 매달렸던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 빗방울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사라진 자리, 또 다른 빗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마치 그 자리가 요람인 듯 흔들의자라도 되는 듯, 그렇게 떨어져 내려 사라진다. 자신이 빗방울이었던 모든 흔적을 지운 채 사라진다. 자신이 더 큰 빗방울이 되었다는 듯이, 더 큰 빗방울이 되어 흐르고 있다는 듯이, 저기,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은 빛난다. 멸실환―, 멸실환처럼 지워지면서 빛난다. 이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더 큰 자기 자신으로 만나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지워진 자리가 하나의 완성이라는 듯이―.
2
그래, 물방울의 종족은 물방울뿐이다
물방울의 家系도 물방울로만 이루어져 있다
마치 물방울은 물방울만 낳는 유전자를 가졌다는 듯이
유사 이래, 오로지 한 핏줄 한 얼굴들뿐이다
혹시 물방울은 물방울로만 남아야 한다는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처럼
물방울의 母系에서 고리 하나를 빼버린 것처럼
그러니까…… 물방울에서 다른 물방울로 진화할 수 없도록
자자손손 물방울은 오로지 물방울로만 남아야 하는 것처럼
3
그런데 저기 봐―, 웬 사람 하나가 손에 커다란 확대경을 들고 홀로 숲을 헤매고 있다. 풀벌레 소리 하나
풀잎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구부정히 허리를 굽힌 채
자신이 무슨 어쿠스틱 음향 채집가라도 된다는 듯이
그런 자신이 물방울이 낳은 물방울의 자손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이 시대의 멸실환인지도 모르고―
- 《시와 경계》 2017년 여름호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바자울에 기대다』 『잉어』 등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1,2』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 등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시인광장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제1회 한유성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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