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훌쩍 넘어 아이스크림 / 서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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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29회 작성일 17-10-10 14:52본문
서른을 훌쩍 넘어 아이스크림
서효인
우리는
아직 아버지는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에 적당할 나이
책상 위에 놓인 청첩장의 디자인을
살펴볼 나이 예쁘고 작은 종이에서 단서를 찾아
남의 삶 전반을 추리하는 나이 그럼 그렇지 그렇다면
대봉하는 나이
나는 오늘 저녁 좋은 아빠의
상징인 베스킨라빈스에 갔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설탕 덩이를 뜨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목을 애처롭게 여기는 나이지만 카드를 내밀기 전 얼음
처럼 차가워지는 나이이며 포인트 적립과 사은품을 챙기며
드라이아이스가 되는 나이이다
초콜릿과 녹차가
섞이고 가운데는 단단한데
한갓진 데는 녹기 시작한 나이가 됐다 이렇게
얼마나 이렇게 더 살아야 하나 20년 지나 30년
나는 은행과 약속을 했다 죽지
않기로 성실히 살기로 이 약속은 녹지
않는다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우리 할머니가 몇 살이더라
남의 삶 전반이 가늠되지 않는
나이 우리는
단 것을 먹으면 혀가 간지럽고
쓴 것을 먹으며 혀를 긁는다
건강을 위해 이렇게
내가 좋은 아빠다 죽지 않는 아빠다
노인의 빈소
모락거리는 연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제 할 일을 다하고
30년의 장례를 준비한다
삼가,
열심히 녹으면서
- 월간 《시인동네》 2017.10월호
1981년 전남 목포 출생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에세이 『잘 왔어 우리 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등
제3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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